[현태식 칼럼](25)뺑뺑이 노름의 유혹

현태식 전 제주시의회 의장

2015-05-26     영주일보

친했던 친구의 배신에 나는 며칠간 분노와 불안과 서글픔에 뒤섞인 마음을 진정시키지 못하고 안절부절하고 있었다. 더욱이나 갑갑한 것은 그 친구에게서 돈을 되돌려받지 못하게 되니 내년까지 겨울을 날 방도가 막막하였다. 하루는 목적없는 걸음으로 서울거리를 헤매었다.

중앙청을 돌아 태평로 길을 정처 없이 터벅터벅 발길을 옮기고 있는데 플라타너스 나무 밑에서 뺑뺑이 노름꾼을 만났다. 이번엔 예전의 제주시 사라봉 밑에서처럼 바람잡이도 없고 혼자서 뽑으라고 외쳐대고 있었다.

종이를 뱅뱅 말아서 길쭉하게 하고 그런 것 대여섯 가닥을 잡고 하나를 선택하여 뽑아 표시 있는 것이면 건 돈의 두 배를 준다고 유혹하는 것이었다. 이 절망의 순간에 나는 나도 모르게 손이 나가 그것을 한 가닥 잡고 있었다. 흠찔했다. ‘제주도 사라봉 밑에서의 일, 그 결과 견딜 수 없는 배고픔의 고통을 잊었는가’라고 마음속에서 부르짖고 있었다. 결심했던 대로 해라. 배운 것을 잊었는가? 뇌리를 스쳐가는 상념이 있어 손을 쑥 빼어 물끄러미 서로 마주 보았다. 결국 뽑지 않았다. 선행학습의 효과가 나타난 것이다. 그 날은 아현동 고개 넘어 한강이 바라보이는 마포친구네 집까지 가서 밥 한 끼 얻어 먹고 다락방에서 곤죽이 된 채 쓰러져 버렸다.

어려움이 닥치고 무슨 손해 볼 일이 생길 때마다 ‘비싸게 지불하고 배운 것이 가치 있지, 다시 되풀이하면 안돼’하고 혼자 다짐하곤 했다. 그 이후 나의 주변에 있는 사람은 내가 화투놀이, 복권사기 등 사행행위를 하는 것을 본 사람이 없을 것이다.

어쨌던 만리타향에서 돈도 없고 집도 없고 대학마저 떨어진데다가 온몸을 휘감는 병마가 나를 완전히 무기력한 거렁뱅이로 만들어가고 있었다. ‘거저 먹으려면 재앙이 닥쳐’라는 신념이 나를 지켜줬기 때문에 그나마 위기의 순간을 넘긴 것이다. 그러나 굶고 살아갈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나는 모든 것을 체념하고 이 해 겨울 목포행 완행열차에 몸을 싣고 말았다. 청운의 꿈을 접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