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상금의 시방목지](91)담쟁이

2023-06-05     문상금

‘동면에서 깨어난 새순들이 갈수록 푸르러간다, 아찔한 전진 또 전진, 이 세상을 다 점령할 기세다’

 

담쟁이

 

문상금

 

동면(冬眠)에 들었던
너는 거대한 짐승

문득 온 몸이 간지러워
움찔움찔 뒤척일 때마다
두꺼워지고 갈라진 손
피부 비늘 사이로
눈부시게 돋아나는
새순들

나에게 벽(壁)은
아무것도 아니다
나무도 아무것도 아니다

오로지 납작 엎드려
포복으로 전진할 뿐이다

새순들을 이끌고
나날이 무성해지는
수만의 잎들을 이끌고
하늘 끝까지 뻗어나가는
나는 한낱 담쟁이

한 걸음 한 걸음
오늘도 담쟁이는
벽을 점령한다
세상을 점령한다
 

-제6시집 「루즈 바르기」에 수록
 

문상금

돌담에 악착같이 흡착한 담쟁이들은 날이 갈수록 새순들이 돋고 자리를 넓혀나갔다, 그 처절하고 눈부신 생존이 다 아찔하였다. 담쟁이들에게 돌담이나 벽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높은 나무도 아무것도 아니었다. 동면에서 깨어나며 문득 온 몸이 간지러워 움찔움찔 뒤척일 때마다 두꺼워지고 갈라진 손 피부 비늘 사이로 눈부시게 돋아나는 새살들, 새순들

깊은 숲으로 들어가 보았다, 소나무 몸통을 비집고 들어가 줄기 뻗은 담쟁이를 보았다, 아니 송담을 보았다. 사람이나 나무나 앉을 자리 누울 자리를 잘 잡아야 한다.

붉은 벽돌을 타고 바위를 지나 지문이 닿도록 뻗어나가는 담쟁이덩굴은 그냥 담쟁이일 뿐이지만 소나무에 자리 틀어 튼실하게 줄기 뻗어 나가면 비로소 송담이 된다.

송진을 빨아먹으며 좋은 약초로 변신하는 그것들은 애초에 어떻게 소나무에 자리를 틀 생각을 하였을까? 좋은 약초도 되지 못하고 앉을 자리도 누울 자리도 작은 돌 틈에 자라는 솔 씨앗 하나처럼 늘 아찔한 나는 소나무를 휘감고 나날이 푸르게 뻗어나가는 송담 줄기의 하늘 향한 날개가 부럽기만 하다.

동면(冬眠)에 들었던 너는 거대한 짐승, 나도 거대한 짐승, 나날이 무성해지리라 세상을 점령하리라.

혹 그대여 두려워하지 마세요, 담쟁이 뿌리가 껍질에 흡착하고 덩굴이 칭칭 온 몸을 휘감아오더라도 끝까지 하늘로 치솟는 나무가 되세요.

행여나 그대여 푸른 덩굴을 탓하지 마세요, 밀어내지 마세요, 서로 손 맞잡고 더 푸른 꿈을 향하여 날아오르세요.

새순들을 이끌고 그 수천수만의 보석 같은 잎들을 이끌고 하늘 끝까지 뻗어나가는 걸음걸음의 여정들, 오늘 이 순간에도 담쟁이와 시인은 전진하고 또 전진한다.[글 문상금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