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상금의 시방목지](90) 할미꽃

2023-05-29     문상금

‘짙은 보라 털 보송한 예쁜 꽃 할미꽃을 꺾어들고 또래들과 소꿉놀이 하였던 어린 시절이 마치 꿈속의 일과 같다’ 
 

할미꽃
 

문상금
 

내 마음의
따뜻한 산언덕에
피어나는
할미꽃

솜털이
보송보송한
할미꽃

살아갈수록
생각할 일이 많아
더 많이 적막(寂寞)한
자줏빛 옷고름 같은
할미꽃

흰머리 풀어헤치고
세월에 굽은 허리
잠시 펴고 숨 고르는
저 할미꽃

그것은 비로소 열매 맺힐 때
백발 되어 날리는
단심(丹心)이다.

볕 좋은 날
초가집 툇마루
할머니 흰 머리 꽃으로
휙 날아든
아아,
백두옹(白頭翁)*

*백두옹(白頭翁) : 할미꽃의 한자어 표기
 

-제6시집 「루즈 바르기」에 수록

문상금

어릴 적 집 북쪽의 드넓은 들판과 산언덕은 자유로운 놀이터였다. 아마도 그 사시사철 꽃 피고지고 변화무쌍한 자연적인 공간들이 훗날 시를 써나가는 데에 많은 경험과 자산이 되지 않았나 싶다.

추위를 뚫고 돋아나는 어린 싹들과 이름 모를 야생화들, 열매들, 낙엽들, 그리고 발가벗은 겨울나무들

뱀들, 지네들, 산토끼들, 염소들, 산새들, 까마귀 떼, 바글바글 태어나 낑낑대던 누렁이들 ...

양지 따뜻한 산언덕 잔디위로 수북이 꽃대 올리고 피어나던 할미꽃들, 아마도 외로워 친구가 필요하였나 보다, 무리지어 피어 있곤 하였다.

솜털이 보송보송하였던 그 꽃들은 세월이 흐를수록 살아갈수록 생각할 일들이 하도 많아 더 많이 적막해졌고 자주 옷고름 같은 꽃잎은 더 짙어졌고 그러다 한 잎씩 바람에 퍼뜩 뒤집어졌고 흰 머리가 산발해졌다.

꽃 지고 열매 맺힐 때 백발 되어 날리는 단심(丹心)을 비로소 알았다, 흰 머리꽃으로 다시 피어난 할미꽃의 이름을 비로소 잘 알게 되었다.

아아, 백두옹(白頭翁), 내 마음의 따뜻한 산언덕에 여전히 피어있는 할미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