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항신의 벌랑포구](42) 꽃들이 먼저 알아

최영미 시인

2021-12-20     김항신

꽃들이 먼저 알아


최영미


당신이 날 버리기 전에
내가 먼저 떠나지 않을 거야

나비가 날아든다는 난초 화분을 집 안에 들여놓고
우리의 사랑처럼 싱싱한 잎을 보며 그가 말했다
가끔 물만 주면 돼.
물, 에 힘을 주며 그는 푸른 웃음을 뿌렸다
밤마다 나의 깊은 곳에 물을 뿌리고픈 남자와
물이 말라가는 여자의 불편한 동거
꽃가루 날리는 봄과 여름을 보내고
첫눈이 오기 전에 나는 그를 버렸다
아니, 화분을 버렸다

소설을 쓴답시고 정원을 배회하며
화분에 물 주기를 잊어버렸다
꽃들이 더 잘 알아.
나비가 날아들지 않는 난초 화분 옆에서
시들시들 떨어진 꽃잎을 주우며 그가 말했다
얘네들이 더 잘 알아.
당신이 날 어떻게 생각하는지
당신이 날 버리기 전에
내가 먼저 시들지 않을 거야

먼저 버린 건, 당신 아니었나?


<다시 오지 않는 것들> 이미 2019
 

최영미

<최영미 시인>

서울 출생, 시인이며 소설가
1992년 창작과 비평으로 등단 
장편소설 《흉터와 무늬》, 《청동 정원》등 다수의 시집 출간
2006년 13회 이수문학상 시 부문 수상과 많은 저서를 냄.
 


 

김항신

꽃들이 먼저 안다.
그대를 받아들일지 말지를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글 김항신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