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청비](20) 순례길의 추억

김순신 수필가(제주수필문학회장)

2021-05-20     김순신
김순신 수필가(제주수필문학회장)

정년을 마치고 버킷리스트 목록 하나를 지웠다. 살면서 버킷리스트 하나씩 지우는 일처럼 행복한 일은 없다. 꼭 가고 싶었던 산티아고 순례길을 다녀왔다. 31간 걷는 길은 고통, 행복, 환희, 감동, 피로, 실망, 깨달음, 보고 느끼는 즐거움이 함께 하는 길이었다. 지금도 그때 걸었던 길들이 그리워진다. 산을 넘는 길, 내리막길, 길게 곧은 길, 작은 동산을 넘고 골짜기를 지나는 길, 포도밭을 지나는 길, 밤이 수두룩 떨어진 길, 집들이 많은 마을 길, 허허벌판 길, 먼지 날리는 길, 질퍽거리는 길, 눈 내리는 길, 숲길. 양 떼들이 노니는 목장길 등이다.

지금도 그 길에는 누군가가 걷고 있을 것이다. 각자의 배낭을 지고, 각자의 소망을 안고 묵묵히 걷는 이들이다. 순례길을 걷는 이들은 이유가 있다. 빈 가슴, 아픈 상처, 해결해야 할 과제, 마음의 짐, 그 외 가면을 쓴 자신과 함께 하는 사람들이다. 걷다 보면 휑한 바람이 스치는 가슴이 따스한 온기로 채워질 수도 있다. 상처 입은 가슴이 서서히 아물기도 한다. 별것도 아닌 일에 매달려 에너지를 탕진했음을 깨닫기도 한다. 나만 무거운 짐을 진 것 같은 불평도 잊힌다. 진정한 자신과 대화하면서 가면을 벗어던지기도 한다. 그게 순례길이 가져다주는 특효약이다.

31일간의 여정 중 최종 목적지인 스페인의 산티아고데 꼼뽀스텔라 대성당에 도착했을 때 가슴이 벅차올랐던 순간을 잊을 수 없다. 감사 기도가 저절로 나왔다. 대성당 미사참례를 위해 미사 시간을 확인했다. 순례자 여권을 들고 완주증을 받으러 사무실을 찾았다. 칸 칸마다 찍힌 새요(도장)를 보고 담당자는 완주증과 완주 증명서를 내어준다. 내 이름이 또렷이 적힌 완주증을 받아드니 비로소 감격이 밀려왔다. 남편은 만세를 외쳤다. 힘들게 걸어온 일은 잊어버리고 성취감으로 가득 찼다. 그 성취감이 주는 약발은 아마도 평생 갈 것 같다. 자신을 인정하고 믿어주는 힘이 생기고 도전하고 싶은 용기까지 얻었다.

나이가 들면서 뭔가에 도전하는 일은 쉽지 않다. 버킷리스트를 하나씩 지울 수 있는 계획과 실행이 필요하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기 위해 사전에 우리나라 동해안 ‘해파랑길’을 걸은 것도 많은 도움이 되었다. 순례길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하나씩 준비해 가는 과정도 좋았다. 준비물을 방안에 늘어놓고 배낭을 몇 번씩 쌌다가 풀었지만, 정작 출발하고 보니 배낭 정리가 잘 안 되었음을 알았다. 한국 음식을 너무 많이 가지고 가서 짐이 무거워져서 낑낑거렸다. 스페인 음식은 입에 잘 맞아서 현지에서 사 먹어도 될 일이었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여덟 번째 걷는 한국 분을 만나니, 나도 나중에 다시 올 수 있을까 했다. 지금은 다시 가고 싶다. 남편은 다시 그 길을 걸을 계획을 하고 있다. 나는 이왕이면 다른 코스의 순례길을 걷자고 했다. 프랑스 출발이 아닌 포르투에서 출발하는 길이 있다. 다음에는 그 길을 가고 싶다. 그 꿈이 현실이 되는 날이 오기를 바라지만, 코로나 19로 그 가능성은 점점 흐릿해지고 있다.

한 치 앞도 모르는 게 인생이다. 코로나 19로 펜데믹이 올 줄 누가 알았겠나. 그렇다고 미래를 예견하는 능력이 있다면 사는게 더 무의미할 것이다. 결과가 불확실 하더라도 하고 싶은 일에 도전하고 견디어내고 이루어내는 것이 참으로 사는 것이다.

이스라엘 성지를 다녀오는 것도 버킷리스트 목록에 있다. 다음에 기회가 오면 가야지 생각만 하다 말았다. 이스라엘은 마스크를 벗었다고 하니 머지않아 갈 수 있을 거다. 최근에 종교행사에서 수많은 사람이 압사를 당한 슬픈 사고가 있어서 가슴이 아프다.

걷는다는 것은 온전히 자신을 지상에 세워놓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멈추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는 게 인생이다. 종착지가 어디든 가는 게 인생 아니던가.

순례길을 다녀왔다는 소식을 듣고 꼭 가고 싶다고 하신 분이 계셨다. 더 늦기 전에 가야겠다면서 이것저것 물어보셨다. 관련된 책도 빌려 드리고, 필요한 정보도 전해드렸다. 몇 달 후 그분은 나이 칠십에 도전하여 산티아고 순례길을 무사히 완주하고 오셨고, 지금도 활기찬 생활을 하고 계시다. 코로나가 오기 전에 다녀왔으니 다행이다.

길은 누가 어떤 마음으로 걷느냐에 따라 순례길이 되기도 하고 그냥 지나치는 길이 되기도 한다. 순례자가 땅을 딛고 하늘을 우러르며 소망을 품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걸으면 순례길이 되는 것이다. 제주의 올레길도 누군가에게는 순례길이다. 지금쯤 순례자가 되어 걷고 있을 많은 사람을 생각한다.

잠시 길 위에 서 있었다. 휘어진 길의 끝이 큰 언덕 뒤로 숨어드는 눈앞의 풍경은 아름다웠다. 그 길을 따라가면 끝나는 그곳에서 누군가를 만날 것만 같은 설렘이 있는 순간 뒤돌아본다. 걸어온 길보다 걸어가야 할 길이 더 짧은 지점에 이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