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순진의 시의 정원](52) 나비를 읽는 법

박지웅 시인

2021-05-08     양순진

나비를 읽는 법

박지웅


  나비는 꽃이 쓴 글씨
  꽃이 꽃에게 보내는 쪽지
  나풀나풀 떨어지는 듯 떠오르는
  아슬한 탈선의 필적
  저 활자는 단 한 줄인데
  나는 번번이 놓쳐버려
  처음부터 다시 읽고 다시 읽고
  나비를 정독하다, 문득
  문법 밖에서 율동하는 필체

  나비는 아름다운 비문임을 깨닫는다
  울퉁불퉁하게 때로는 결 없이
  다듬다가 공중에서 지워지는 글씨
  나비를 천천히 펴고 읽고 접을 때
  수줍게 돋는 푸른 동사들
  나비는 꽃이 읽는 글씨
  육필의 경치를 기웃거릴 때
  바람이 훔쳐가는 글씨


- 시집 <구름과 집 사이를 걸었다> (문학동네, 2012)
 

박지웅

■ 박지웅 시인
- 1969년 부산 출생
- 추계예술대 문예창작과 졸업
- 2005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등단
- 시집  <빈 손가락에 나비가 앉았다>
            <너의 반은 꽃이다>
           <빈 손가락에 나비가 앉았다>
          <당신은 시를 쓰세요 나는 고양이 밥을 줄 테니>

양순진

  나비에게 꽃이 없었다면, 꽃에게 나비가 없었다면 그들은 생존할 수 있었을까. 꽃이 핀 자리에 항상 나비가 있고 나비가 날아다니는 곳에 항상 꽃이 있다.내가 있는 곳에 네가 있고 네가 있는 곳에 내가 있다.
 
  '나비는 꽃이 쓴 글씨', '나비는 꽃이 읽는 글씨'라고 시인은 노래하고 있다.
  그러나 정작 화자는 그 한 줄 글씨를 번번이 놓쳐버려 읽어내려고 애쓴다. 도망치는 나비의 생을 쫒아다니며 정독해보려 하지만 어느새 바람이 훔쳐가 버린다. 결국 나비의 문장은 비문임을 깨닫게 된다. 우리네 삶 또한 백일몽일 수 있다는 경고!

  꽃이 쫓는 건 나비가 아닐지 모른다. 꽃이 읽는 것 또한 나비가 아닐지 모른다. 우리가 쫓는 것 또한 나비가 아닐지 모른다. 우리가 읽는 것 또한 나비가 아닐지 모른다. 나비처럼 공중에서 사라지는 것들, 나비처럼 봄에게서 이탈되는 것들, 나비처럼 꿈과 현실의 경계에서 파닥이는 것들, 그 모든 현상이 어쩌면 시시하지만 절절한 오늘의 필적일지도 모른다.

  우리에게 봄이 없었다면 꽃과 나비의 존재 또한 무의식에 불과한 것처럼 우리에게 꽃과 나비가 없었다면 시도 꿈도 무용지물 아니었을까. 지옥 끝까지 너를 쫓는 사랑이라는 굴레 또한 행복한 지옥인 것을. [양순진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