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순진의 시의 정원](51) 무명천 할머니의 봄

양순진 시인

2021-04-02     양순진

무명천 할머니의 봄

 양순진


하얗게 그을린 슬픔 감싸안은 채
살려고 하지도 못하고
죽으려 하지도 못하고
한 방에 날아가버린 턱은
한 방에 날아가버린 봄꿈처럼
풍랑 이는 바다 떠돌다가

어둠으로 가득찬 집으로
들어가지도 못하고
바람이 떠밀면
바람의 중력에 못 이겨 콕 박혀
또 몇 밤 떨면서 나오지 못하던
한립읍 월령리 집터

지우려고 지우려고 애쓰던
찢겨진 시간
덮으려고 덮으려고
둘러맨 몇 겹 무명천
저 빈 집 울타리
노란 선인장으로 피었네
온 몸 가시로 투항하며 버티던
슬픈 생애
알알이 붉은 열매로 맺혔네

모래기 할망
진아영 할망으로 불리다가
역사의 증인으로 방방곡곡
노란 물 붉은 물 들이는
우리의 무명천 할머니
눈 감아도 귀 막아도
봄이 와도 잊혀지지 않는다
 

양순진

  다시 4월, 변함없이 비가 내린다. 꽃비가 내린다. 2021년 4월 2일 오전 11시, 제주 4.3평화공원 문주에서 '제주 4.3 73주년 시화전 개막식'이 열린다. '거기, 꽃 피었습니까'라는 제목의 시화전은 9월 30일까지 계속된다.

  요즘 어느 초등학교에서 '인권 평화' 수업을 하고 있다. 아니 가르치면서 내가 공부하고 배우고 있다. 어제는 '제주 4.3 평화 인권 교육 -제주의 하늘은 아직도 슬프다'라는 주제로 수업했는데 가슴이 먹먹했었다.
 
수업 중간 중간에 나의 4.3 동시 '숨비나리'도 낭송해주고 내일부터 시화전에 걸릴 나의 4.3 시 '무명천 할머니의 봄'도 낭송해 주었다. 함께 공감하고 함께 분노하고 함께 통탄하며.

  무명천 할머니는 1914년생으로 4.3사건이 일어난 다음 해인 1949년 1월 35세 나이에 한경면 판포리 집 앞에서 경찰이 무장대로 오인해 발사한 총탄에 턱을 맞고 쓰러진 뒤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졌다.
  아무도 돌봐줄 사람이 없자 언니가 월령리로 데려와 살게 되었다. 할머니는 선인장 열매를 따거나 톳을 따다가 품팔이를 하며 살아갔다. 턱과 이가 없어 씹지를 못하니 소화불량으로 인한 위장병과 영양실조는 늘 달고 다녀야 했다. 그러다가 2004년 9월 8일 세상을 떠나셨다.

  무명천 할머니에 관한 책을 읽다가 곧바로 이 시를 썼다. 다음 주에는 아이들에게 무명천 할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더 깊이 들려주고, 함께 책을 읽고 많은 대화를 나누어야겠다. 평화와 인권의 소중함에 대해. [글 양순진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