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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회 2019영주신춘문예 당선작 선정 발표
제12회 2019영주신춘문예 당선작 선정 발표
  • 서연실 기자
  • jeju@newslinejeju.com
  • 승인 2019.01.01 09:5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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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문별 당선자...원기자(시), 고윤석(시조), 안희옥(수필)씨
전국에서 총 2409편(시 1352, 시조 435, 수필 622) 응모
26일 오후3시 제주도의회 도민의 방에서 시상식 개최
2019영주신춘문예 당선자(사진왼쪽부터) 원기자(시부문), 고윤석(시조부문), 안희옥(수필부문)씨
▲ 2019영주신춘문예 당선자(사진왼쪽부터) 원기자(시부문), 고윤석(시조부문), 안희옥(수필부문)씨 @뉴스라인제주

제주의 중심 인터넷신문 ‘영주일보사’가 인터넷 신문사상 전국 최초로 시행하는 ‘제12회 2019 영주신춘문예’ 당선작이 선정, 발표됐다.

해를 거듭할수록 뜨거워지는 영주신춘문예의 시부문 당선작은 원기자(서울시 송파구)씨의 ‘기도’가 결정됐다. 시조부문 당선작은 고윤석(충남 아산시)씨의 ‘고무공 성자’가 결정됐다. 수필부문 당선작은 안희옥(경북 포항시)씨의 ‘마디’가 선정됐다.

응모작은 총 2409편(시 1352편, 시조 435편), 수필 622편)이며, 시상과 관련한 자세한 내용은 추후 당선자들에게 개별적으로 공지할 예정이다. 시상식은 1월26일(토)오후 3시 제주시 연동 소재 제주도의회 도민의 방에서 실시할 예정이다. 당선작가에게는 100만원의 상금과 함께 인터넷신문 ‘영주일보’의 상패가 수여된다.

[시 당선작]

기도

일면식도 없는 햇살이
평화의 소녀상 앞에 십자가로 세워집니다
아무도 보듬어주지 않는 상처를 온몸으로 끌어안은 할머니가
외줄 위의 어름사니처럼 아슬아슬하게 넘어갑니다
헐렁한 약속을 꿰어보자고
옷고름 풀고 앉아 빈 하늘에 보내는 침묵을
귀 세워 듣는 이 없네요
열세 살 어린 꽃송이
군용트럭에 실려 어둠의 터널로 들어섰지요
속살 드러낸 허공이 이제 막 달거리 시작한 꽃잎으로
휘파람을 불며 달려들던 밤에는
비린내가 사라질 때까지 노래를 불렀지요
그 노랫소리 배경삼아 스스로 껍질이 된
한 여자의 붉은 생, 반듯한 체면을 따라가면
목숨처럼 그러안은 기도가 쏟아집니다
인생이란 단막극을
주연으로 살아본 적 없는 몸, 숨이 멈추면
“미안합니다”
듣고 싶은 그 말 한 마디 염원으로 남기고
십자가 꼭대기 푸른 하늘에 한 줌 햇살이 되리

원기자씨(시부문 당선자)
▲ 원기자씨(시부문 당선자) @뉴스라인제주

[당선소감]

김군자 할머니의 영면 소식이 전해지던 날
햇살보다 더 환한 모습으로 수요집회에 모인 학생들이
십자가처럼 오랫동안 평화의 소녀상 앞을 지켰습니다.
낙엽 같은 당신이 눈에 밟혀 낮선 기억을 더듬어봅니다.
그날의 슬픔이 오늘 이렇게 큰 기쁨이 되어 부메랑처럼 날아오다니, 꿈만 같습니다.
어린시절 목이 긴 양말을 문고리에 걸어놓고 크리스마스 선물을 기다리던 것처럼 우편물을 보내놓고 짧은 오침 시간에도 전화기를 꼭 쥐고 얕은 잠을 잤습니다.
그러다 포기하고 일상으로 돌아왔는데……. 당선 전화를 받고 히죽히죽 웃으며 거리를 걷는데 지나가는 모든 사람들이 선물처럼 다가섭니다.
허리가 휘도록 자식들 뒷바라지한 어머니, 당신의 거친 손마디가
한없이 그리운 날입니다 당신 딸이 시인이 된 것을 알면 두 눈 가득 눈물 글썽일 어머니 그곳에서는 고통 없이 행복하시길 기도할게요.
처음 위안부 할머니들의 아픔을 적어 보겠다고 마음먹으면서 제 글이 미흡하여 그분들께 오히려 상처가 되면 어쩌나 생각했는데 큰 상을 받게 되어 기쁘고 얼마 남지 않은 시간 좀 더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상처를 어루만지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언제나 듬직한 남편, 사랑하는 딸들
늘 엄마를 자랑스럽다고 말해줘서 고마워
살아가면서 힘든 일도 기쁜 일도 두 손 꼭 잡고 웃으면서 함께 가보자
부족한 글을 뽑아주신 심사원님, 영주일보 사장님과 관계자 분들 모두 감사합니다.
영주일보라는 이름표를 가슴에 달고 뚜벅뚜벅 걸어보겠습니다.

*약력

강원도 둔내 출생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원 문예창작전문가과정 수료

[시 부문 심사평]

좋은 시 한 편에 가닿기까지 숱한 절망과 좌절의 고통을 겪어야만 되는 것 같다. 응모 된 천여 편에 가까운 시를 읽으면서 시를 향한 열의를 느낄 수 있었다. 눈에 띄는 한 편을 찾기 위해 정성스레 세세히 살피면서 읽어 내려갈수록 조바심이 나기 시작했다. 1990년대 이후 유행처럼 번져 식상 단계에 다다른, 새로운 감각을 만들려는 시도는 엉뚱한 단어와 억지스런 문장으로 조립된 시들로 넘치고 있었다. 마땅한 자리에 적확히 놓인 단어를 통해서 우리의 생각은 구체화 되며 새로운 방향을 모색할 수 있게 된다. 생각의 구체화를 통해서 다른 생각으로의 이행 혹은 비약, 깊어지면서 새 길을 찾을 때 우리는 그러한 시에 매료되는 것이다.

심사자는 고심 끝에 최종 세 편으로 압축해서 살폈다. 「분보후에」를 쓴 송종철의 시선은 현미경처럼 정밀하다. 사물을 세세히 묘사하는 솜씨 또한 놀라웠다. 응모된 다른 두 편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응모된 작품이 세 편뿐이라서 그런지 세 편 모두 시의 소재가 낯선 것들을 다루고 있다. 소재주의에 빠질 우려가 있다. 당선작으로 해도 무방할 것 같아 손에서 놓기가 아쉬웠다. 고영숙의 「나를 낳아주세요」는 언어를 비틀어 이미지의 신선함을 이끌어내려는 노력이 돋보였다. 원기자는 「기도」 외 두 편의 시를 응모했는데 진부한 주제와 제목이 눈에 거슬렸다. 그러면서도 다시 읽게 하는 힘이 있었다. 우리 주변의 인물들에 대한 시인의 속 깊은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웃의 비극적 삶에 대해 무관심했던 우리의 시선을 공동체의 삶 속으로 끌어 들이는 울림이 컸다. 그렇다고 감정을 여과 없이 드러내어 시적 미학을 놓친 것은 아니었다. 2019년 벽두에 원기자의 발견으로 우리 시단이 조금은 더 풍요로워지길 바란다.

<심사위원 김성주 시인 대표집필>

[시조 당선작]

고무공 성자

어라, 쪼그만 녀석 여간내기 아니었네
엉덩이 뻥 내질러도, 허리를 작신 밟아도
도무지 쓰러지지 않네,
두 손 들 줄 모르네.

누르면 꼭 그만큼 이 악물고 튀어 올라
가슴속 숨긴 깃발 하늘 높이 흔들다가
다시금 지상에 내려
낮은 곳을 살피네.

마음조차 둥글어서 각진 세상 품은 걸까?
진자리 마른자리 아래로만 길을 찾는
속 텅 빈 고무공 성자,
걸음마저 탱탱하네.

고윤석씨(시조부문 당선자)
▲ 고윤석씨(시조부문 당선자) @뉴스라인제주

[당선소감]

덤덤하게 걸려온 전화 한 통이 가슴 속에 회오리를 일으켰다.

까마득한 산 앞에서 돌아오지 않는 메아리를 멍하니 기다리던 나락 같은 날들이 가루가 되어 흩날리고 투명한 햇살이 눈송이처럼 포근하게 안겨 오는 아침, 어느 산머리에 올라가 돌처럼 뭉친 응어리를 펑펑 쏟아 놓고 싶었다.

무슨 조화였는지 교실 창가에서 말라 죽어 가는 화분 속 꽃들을 보며 학생 때 외운 음보를 떠올려 ‘환경미화’란 제목으로 쓴 첫 작품이 중앙일보에 덜컥 실린 이후, 달콤하게 때론 처절하게 숱한 시간을 태웠다. 그렇게 열병을 앓다 ‘아, 나는 천재성이 없구나’라는 씁쓰름한 자각과 함께 10여 년 외도하다 방황의 발걸음이 이끈 곳이 다시 시조였다. 세상일이 그렇듯 시는 천재성보다 치열한 산고 속에서 태어난다는 깨달음과 함께.

기뻐해 주는 동료 시인들의 축하 전화를 받으며 고독감에 몸부림쳤던 이 여정이 혼자가 아니었다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오늘의 영광이 있기까지 이끌어주신 윤금초 선생님과 그리고 늘 내 일처럼 응원해주는 장은수 회장님, 조성문 시인, 박희정 시인, 임채성 시인 등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동문과 모든 분께 고마움을 전한다. 또한, 흔들리는 발걸음을 잡아 주고 현대시조의 발전에 일익을 담당하라는 채찍을 가해 주신 심사위원님들께 허리 숙여 인사를 올린다. 기대에 부응할 수 있도록 늘 깨어 삶과 사람을 노래하리라. 마지막으로 어머님과 장모님의 건강을 빌며 묵묵히 응원해주는 사랑하는 아내 조인옥과 지수, 지영, 지형과 함께 이 기쁨을 나누고 싶다.

*약력

1961년 충남 서산 출생.
한양대 졸업. 동국대 법학박사. 현직 교원.
제17회, 제18회 공무원문예대전 시조부문 동상 수상.
2017년 중앙시조 백일장 11월 장원 수상

[시조부문 심사평]

“평범한 사물의 속성 예리하게 포착, 주제를 단아하게 들어앉혀”

등단제도의 문제점이 꾸준히 지적되어지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 중에서도 화려한 등단을 꿈꾸는 작가들의 로망은 단연 신춘문예임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이번 응모작들은 신인의 작품이라고 보기에는 너무나 노련하고 탄탄한 수준급의 작품들이 많아 신인 등용문인 신춘문예 심사가 아니고 기성작가의 문학상 심사를 하는 듯 했다.

전국에서 보내온 400여 편의 작품을 한 편 한 편 읽어볼 수 있어서 개인적으로는 행복했다. 하지만 단 한 편의 당선작을 고르기 위해 작품을 추려내면서 송구스러울 정도였다. 작품 수가 많기도 했지만 수준 높은 작품들이 많아 심사의 기준을 명확히 하지 않으면 도저히 판가름을 낼 수 없는 지경이었다.

무엇보다 신춘문예의 이름값에 가까운 신선하고 패기있는 작품이면서 정형시인 시조의 운율과 맛을 잘 살려낸 작품을 우선순위에 두었다. 손에서 내려놓기가 아쉽고 미안한 작품들이 많았지만 서형국, 조우리, 조경섭, 이형남, 허순옥, 고윤석의 작품만 남겼다.

서형국의 ‘바람 우체부’는 감각적인 표현들이 신선했으나 마지막 수까지 끌고 가는 힘이 부족했다. 조우리의 ‘후드티’ 등 작품은 대부분 5수 6수 짜리였는데 끌고나가는 힘은 있었으나 압축과 절제라는 시조의 묘미를 살려내는데 다소 부족함이 있었다. 조경섭의 ‘세한도를 읽다’는 무리 없는 편안한 전개는 좋았으나 잡아끄는 매력이 조금 부족했다. 이형남의 ‘정물이 되는 저녁’은 이미지가 선명하고 깔끔했는데 당선작으로 선택하기에는 다소 가벼웠다.

마지막까지 엎치락뒤치락한 것은 허순옥과 고윤석의 작품이다. 허순옥의 ‘널문리 아리랑’은 시대성이 부각되는 작품으로 시조의 속성을 잘 살려냈지만 뒷받침하는 작품들의 힘이 조금 모자랐다. 고윤석의 작품은 어느 하나 뺄 것 없이 수준이 균일했다. 정형시 전통의 율격을 지키면서도 현대적 감각으로 쉽고 편안하게 이끌어나가는 품이 한두 해 닦은 실력이 아니다. 특히 ‘고무공 성자’는 평범한 사물의 속성을 예리하게 포착해 작품 안에 주제를 단아하게 들어앉혔다. 시조단의 내일을 이끌어나갈 버팀목이 될 것이라는 기대를 한다.

당선에 들지 못한 분들에게 심심한 위로와 격려의 말을 전해 드린다.

<심사위원 김영란 시조시인 대표집필>

[수필 당선작]

마디

하늘 향해 뻗은 대나무의 기상이 옹골지다. 미끈한 몸매에 둥근 테를 두르고 서 있는 모습은 흡사 초록 옷을 입은 병사들의 열병식을 방불케 한다. 이따금 간들바람이 푸른 대숲을 훑고 지나간다. 무성한 댓잎 사이로 신기루처럼 일어나는 햇살에 눈이 부신다.

굵은 대나무가 길을 가로막는다. 두 손으로 감싸 쥐니 손안에 가득 찬다. 매끄러운 줄기 사이, 마디가 껄끄럽다. 볼록한 부분은 특별히 다른 곳에 비해 단단하고 힘이 있다. 대나무는 기후가 나쁘거나 수분이 부족할 때 성장을 멈추고 힘을 모은다고 한다. 이때 생기는 것이 마디다. 성장판을 닫고 힘을 비축한 뒤 기회가 되면 다시 커간다. 이런 과정을 되풀이하면서 대나무는 휘지 않고 곧고 높이 자랄 수 있는 것이다.

아들 귀한 집안의 다섯째 딸로 태어난 여동생은 그 아래로 남동생이 태어나자, 다른 형제들에 비해 귀한 대접을 받았다. 할머니는 터를 잘 팔아 대를 잇게 해 주었다며 동생을 추켜세웠고, 잘못된 행동을 해도 크게 나무라지 않았다. 할머니의 특별한 사랑 때문인지 동생은 어릴 때부터 고집이 세고 자기주장이 강했다.

대나무가 한창 클 때는 한 시간 동안 자라는 속도가 삼십 년간 자라는 소나무 속도와 맞먹는다고 한다. 생장점이 많기 때문이다. 우리가 흔히 접하는 대부분의 나무들은 줄기 끝에만 생장점이 있는데, 대나무는 마디마다 생장점이 있다. 그러나 줄기의 벽을 이루는 조직은 엄청나게 빨리 늘어나는 반면 내부 성장은 느려서 속이 텅 비게 된다.

조실부모하고 사고무탁한 청년과의 결혼을 집안에서 극구 반대했지만 동생의 고집을 꺾을 수 없었다. 모두들 아무 탈 없이 잘 살아 주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하지만 가족의 걱정은 기우였다. 동생의 결혼생활은 순탄했다. 제부의 사업은 승승장구했고 상류층 사람들과 친분을 쌓으며 자신의 영역을 넓혀 나갔다. 이 곳 저 곳 모임에서 익힌 세련된 매너와 옷차림에 자매들은 모두 부러워했다. 생활의 여유가 있으니 친정 식구들에게도 여러모로 도움을 주었다.

대나무 마디는 멈춤을 뜻한다. 중간에 잠시 쉬었다가 다시 자라면 더 쑥쑥 큰다. 대나무만의 특징이다. 중간에 마디가 형성되는 시기는 유난히 더디다. 그러나 그 마디들이 없다면 가늘기만 한 나무가 그렇게 높이 자랄 수 있을까. 잠시 정지해있는 듯 보이지만 그건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준비의 시간이다. 멈춤이 없다면 진정한 성장도 없다는 교훈을 대나무에게서 얻게 된다.

언제까지나 이어질 것 같던 동생네의 행복이 암초에 부딪혔다. 기다리던 둘째 조카의 탄생을 가족 모두가 기뻐한 것도 잠시, 의료진의 불찰로 그만 하늘나라로 보내고 말았다. 온 세상을 다 가진 듯 넘쳐나던 웃음들이 연기처럼 사라져 갔다. 아이를 지켜주지 못했다는 죄책감으로 가슴에 피멍이 들었다. 동생의 인생에 굵은 마디 하나가 생겼다.

설상가상으로 거침없이 질주하던 제부의 사업이 IMF를 맞으면서 또 한 번 위기를 맞았다. 무리한 사업 확장은 곳곳에 빚을 남겼고, 끝까지 지키려 했던 집마저 경매에 넘어갔다. 하루아침에 길가로 나앉은 신세가 되고 말았지만 어려움을 모르고 자란 터라 새로운 생활에 적응하기란 쉽지 않았다. 월세 단칸방에서 온 식구가 하루하루를 힘겹게 연명해 나갔다. 생활의 여유가 없다 보니 부부간 갈등도 심해 연일 큰소리가 담장을 넘었다. 사춘기에 접어든 큰아이도 점점 밖으로 나돌았다. 삶은 나날이 피폐해져 갔다.

혼다의 창업자 혼다 소이치로는 휴식을 ‘대나무의 마디’와 같다고 말한 바 있다. 마디가 있어야 대나무가 성장하듯, 사람에게도 쉼이 있어야 강하고 곧게 성장할 수 있다는 의미다. 드럼통은 최초, 표면에 아무런 굴곡 없이 매끈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작은 충격이나 굴릴 때 쉽게 찌그러졌다. 누군가 대나무 마디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드럼통 옆구리에 마디를 넣었더니 강도가 네 배나 강해졌다.

시간이 약이라 했던가. 지옥 같던 고통도 조금씩 사그라질 무렵, 새로운 생명이 태어났다. 예쁜 딸이었다. 아이는 동생네의 마지막 희망이었다. 딸이 태어나고부터 신기하게도 살림살이가 나아지기 시작했다. 집안에 다시금 웃음이 찾아왔다.

그것도 잠시, 잘 자라던 아이가 초등학교 2학년이 끝나갈 무렵, 뇌종양이란 큰 병에 걸렸다. 청천벽력이었다. 하늘을 원망하며 속울음을 삼키는 동생을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내려앉았다. 강단 있고 패기 넘치는 모습은 어디에도 찾을 수 없었다. 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받고 있던 동생을 단단하게 버틸 수 있게 한 것은 바로 엄마라는 이름이었다. 아이를 위해 대나무처럼 마음을 비우고 낮은 자세로 임했다. 조그마한 일에도 감사하고 인내하는 삶을 살았다. 그러자 아이의 병도 조금씩 나아져 갔다.

시원스레 하늘로 솟구친 대나무 숲은 보이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다. 죽순이 돋아나고 성장할 때까지 그 음습한 땅 속에서 수년 간 뿌리를 내리는 과정을 거친다. 뿌리가 깊기 때문에 쉽게 쓰러지지 않는다. 속이 빈 채 커 나가는 대나무로서는 반드시 필요한 인고의 세월이다.

대나무는 허허실실이다. 속이 빈 것이 허라면 밖이 단단한 것이 실이다. 내강외유다. 속은 허술해 보이지만 오히려 그것 때문에 더 강하다. 속을 비워 내지 않으면 단단한 마디를 만들 수 없다는 걸 가르쳐준다. 삶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순탄하게 잘 흘러가다가 어느 순간 시련이 닥치곤 한다. 시련은 곧 마디다. 넘어지면 실패가 되고 말지만 그것을 극복하면 승화가 된다. 시련은 크고 강하게 되기 위한 일종의 통과의례다. 작은 일에도 쉽게 절망했던 나의 나약함에 대해 반성해본다.

마디를 가만히 만져 본다. 매끄러운 몸통에서 따뜻함이 느껴진다. 믿음직스럽게 자리 잡은 마디 사이로 봄기운이 가득하다. 대나무 숲 사이로 환하게 웃는 동생의 얼굴이 떠오른다.

안희옥씨(수필부문 당선자)
▲ 안희옥씨(수필부문 당선자) @뉴스라인제주

[당선소감]

가끔씩 대나무 숲에 설 때가 있습니다. 우듬지 사이로 지나가는 청아한 바람소리를 듣는 것도 좋아하지만 무엇보다 마음이 맑아지기 때문입니다. 살면서 부딪히는 여러 가지 번잡한 일들도 거기에선 고요해짐을 얻습니다.

대나무 씨는 뿌린 후 5년 동안 싹이 나지 않습니다. 그 기간 동안 캄캄한 땅 밑에서 부지런히 뿌리내리기 작업을 합니다. 그런 후 마침내 새싹을 땅 위로 밀어 올립니다.

글을 시작한 뒤, 오랫동안 미로 속을 헤매기도 했습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방향을 잃었을 때도 있었고 그만 포기하고 싶은 순간도 많았습니다. 그래도 한 발 한 발 나아가면 이 어둠 끝에 빛이 있을 거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올해의 끝자락에 한 줄기 빛처럼 당선소식을 전해 들었습니다. 돌이켜보면 아직은 모자란다고 스스로 도리질을 하면서도, 까마득하게 걸어놓았던 소망 하나가 드디어 내 앞에서 환히 불을 밝히는 순간입니다. 행여 부족한 실력으로 급하게 달려오지는 않았는지 내심 걱정스럽기도 합니다. 나를 에워싸고 있던 어둠이 걷히자 잠시 눈이 부셨습니다. 눈가가 조금 젖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했습니다. 드디어 땅 위로 올라온 나를 바라보며.

설익은 글을 곱게 보아주신 심사위원님과 꿈을 향해 나아갈 수 있도록 멋진 기회를 주신 영주일보 관계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합평회 때마다 따끔한 회초리를 들어준 <윤슬문학회> 문우님들께도 고맙다는 말 전합니다. 늘 곁에서 힘을 실어주는 가족들, 특히 사랑하는 두 아들 진섭, 민섭이를 비롯해 저를 아끼는 모든 분들과 이 기쁨을 나누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약력

합천 출생
동리목월 문예창작대학 수료 (2012)
동서문학상 수필부문 은상 (2012)
공무원문예대전 수필부문 금상 (2017)
천강문학상 수필부문 우수상 (2018)
동화집 「호미곶 돌문어」 공저 (2014)

[수필부문 심사평]

백여 명이 넘는 신춘문예 수필부문 지망생들은 심사자의 시선을 붙잡을 수 있는 그 무엇을 지녀야 한다. 등단 전에는 숙녀•신사의 정장 복장이 이에 어울린다 할 것이나, 등단후에는 걸인의 옷도 좋다.

수필의 가치는 타인의 공감을 얻을 때 비로소 의미를 지니게 된다. 수필의 공감지수는 나와 우리을 이어주는 연결고리를 문장화 할 때 더욱 높아진다. 이를 위해 문장력을 비롯하여 제목선정, 단락나누기,은유적 표현 등의 포장 능력 역시 간과해서는 않될 것이다.

2019 영주일보 신춘문예에는 전국에서 128명의 예비작가들이 응모하였고, 작품수는 400여편에 이른다. 5편이 넘는 수필을 보내주신 예비작가들도 십여 명에 이른다. 많은 작품을 쓰려는 열정보다 좋은 작품 몇 편을 쓰려는 열정이 습작시기에는 더욱 빛을 발할 수 도 있을 것이다. 백지와 원고지에 친필로 써내려간 분도, 컴퓨터에 내장된 원고지에 출력해 보내주신 분도 계셨다.

수필은 개인적 체험에 대한 연상과 상상을 작품화 하는 것을 그 가치로 삼는다. 과거의 체험이 현재에서 의식화 ․ 내재화 ․ 공유화 되고 그래서 미래의 가치스로움인 멋과 맛이 있는 작품이 되기 위해서는, 작가는 상상과 연상의 날개를 펼쳐야 한다. 이러한 흐름을 바탕으로 하여 우리는 본 신춘문예에 응모된 수필 중에서 시선을 끄는 여덟 분의 작품들을 우선 선정하였다.

이인숙 님의 ‹뒷모습›•‹화무십일홍›•‹그리운 이야기꾼›, 김정미 님의 ‹시간을 흙으로 굽다›•‹누에의 잠›•‹단풍차를 한 손에 든 채›, 김장배 님의 ‹테, 발簾에 들다›•‹뜸›, 이용호 님의 ‹가지 않은 길›•‹예(禮)›•‹시조(時調 예찬›, 장희자 님의 ‹내 안의 감옥›•‹봉황을 먹었다.›•‹엄홍길과 라마스떼›, 이상수 님의 ‹끙게›•‹박새의 포란›•‹둥근 동행›, 조미정 님의 ‹검정›•‹남두육성›•‹둑방 옷 수선집›, 안희옥 님의 ‹마디›•‹떼배›•‹사점死點› 등을 선정하여 다시 정독에 들어갔다. 그리고 최종 심사를 위해 이상수 님, 조미정 님, 안희옥 님 등 세 분의 작품들을 더욱 세밀하게 들여다 봤다.

이상수 님의 수필에서는 농촌에서의 삶의 전경이 눈에 어리고, 박새와 가족들과의 삶과 죽음을 은유적으로 조화롭게 대비되고, 자연과 인간의 동행을 문장으로 잘 버물리고 있다. 조미정 님의 작품에서는‘죽음이란 묵직한 세계를 가벼운 삶의 영역’으로 다루고, 북두칠성에 밀려난 이인자별처럼 여겨지는 남두육성에 대한 깊은 통찰이 돋보이고, 삶의 보풀이 생길 때면 누군가의 수선집이 되고 싶다는 은유적인 삶의 태도가 가슴을 파고 든다. 안희옥 님의 작품들을 다시 만나다니. 어디서 본 듯한 이름이라 작년 심사평을 뒤졌더니, 최종 심사평에 등재된 이름이었다. 낙선의 아쉬움을 뒤로 하고 수필에 대한 열정이 작품 속에 녹아 있는 듯했다. 세 편의 수필을 관통하고 있는 것은, 체험에 대한 연상과 심리변화를 적절하게 버무려 놓은 작품에 몰입케 하는 문체의 긴장감이다

등단 수필가의 작품에 못지 않은 세 분의 작품들을 만난 것은 내겐 행운이었다. 하지만 수 차례의 정독 후에 읽는 재미와 삶의 교훈과 수필의 절제미가 좀더 돋보이는 안희옥 님의 수필 ‹마디›를 최종 선정하였음을 밝히는 것은 결단에 찬 고뇌였다.

<심사위원 문영택 수필가 대표집필>(1977년 자유문학 통해 수필가로 등단, 현 제주역사문화 해설사, (사)질토래비 이사장, 작품집: 무화과 모정, 탐라로 떠나는 역사문화 기행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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