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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태식 칼럼](209)늘그막의 외출
[현태식 칼럼](209)늘그막의 외출
  • 영주일보
  • jeju@newslinejeju.com
  • 승인 2017.06.18 1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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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태식 전 제주시의회 의장

우리는 제주중학교 10회 졸업생들이다. 금년이 졸업 53주년이 된다(2008년 시점). 그러니 1955년에 졸업한 것이다. 동창들은 이미 70살을 넘겼다. 다들 얼굴에 세월의 풍상을 이겨낸 훈장을 여러 개 새겨놓았다. 머리에 서리는 짙게 앉았다.

일본이 대동아전쟁이라는 미명하에 태평양전쟁을 일으켜 식민지의 질곡에서 신음하는 조선을 더욱 수탈해서 끼니를 이을 수 없을 정도로 식량이 부족하고, 조상을 모시는 제사용 제기·수저까지 군수물자를 조달한다는 명목으로 강탈해가는 시절을 어릴 때 체험하고, 해방이 된 후에는 얼마없어 4·3사건이 발발하여 어떤 자는 공비에게 부모를 잃고, 어떤 자는 군·경에게 가족을 잃고 중산간에 산 자는 집과 가재가 잿더미가 되어 뿔뿔이 흩어져 지내며 고단하게 사는 중, 1950년 김일성은 6·25전쟁을 일으켜 남한을 침략함으로써 가난한 백성에게는 죽음의 저승사자로 다가왔다.

이런 혼란기에 학교를 다녔으니 교실이 교실다운 것도 없었고 교과서나 노트나 연필이 제대로 갖추어진 기억이 전혀 없다. 그래도 배워야 한다는 의욕으로 3년간 학교를 다녀 졸업장을 받고 교문을 나서 모진 세파와 죽느냐 사느냐 사투하며 살아온지 어언 53년이 되었다. 그 사이 병들어 타계하고 행방을 알 수 없는 동문이 너무도 많아 동창회에 참여하는 사람이 30여 명 정도다.

회장이 ‘한번 모여 볼까요’ 하며 전화가 왔다. 정이 도타와지고 우정이 샘솟는 뜻 있는 모임을 합시다 하고는 하루 물밖 나들이로 추자도를 다녀오자 했다. 우리는 10회 졸업이니 6월 10일로 하자고 결정을 보고, 회장이 추자에는 쾌속정으로 가면 한 시간 남짓 소요되고 점심을 먹고 구경을 하다 오후 4시 쯤에는 그 배로 돌아올 수 있으니 당일 8시 20분에 제주항 여객터미널에 모이라고 하였다. 설레는 마음이었다. 추자는 안가본 사람도 많았다. 모두가 삶에 매몰되어 열심히 사느라 다른 곳을 쳐다볼 마음의 여유나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다.

9시 30분에 즐거은 마음으로 쾌속정 ‘핑크 돌핀스’에 승선하였다. 배는 제주 산지 항구를 벗어나 북쪽으로 시원스럽게 미끄러져 갔다. 일렁이는 바다 너울에 마치 그네를 탄 듯 하였다. 모두의 얼굴에 뿌듯한 희열과 더불어 잔잔한 미소가 피어나고 담소마다 정겨웠다. 옛날 이야기 같이 살아온 이야기를 늘어놓는데 어느 하나 애환이요 동화요 소설이 아닌 것이 없다.

동문수학 3년이 그렇게도 인간을 질긴 끈으로 묶어놓고 마음 속에 감추고 좀처럼 퇴색되지 않다니 놀랍다. 풀죽도 배불리 못먹던 시절에 책가방을 맨 것이 그토록 사무친 우정으로 남을 줄이야.

백판번뇌같은 일상을 털고 대천 바다 위를 미끄러져가는 우리들의 마음은 푸른 바다처럼 투명하다. 철부지 어린이마냥 천진하여 보였다. 드문드문 돌덩이 던져놓은 것 같던 섬이 가까이 다가오니 바위에 부서지는 포말과 씻겨나간 바위 그 위에 푸른 초목, 참으로 신선이 쉬는 곳 같고 아무리 재주좋은 작가도 이 변화와 조화가 기막힌 자연의 전경을 화폭에 그대로는 못담으리라.

어느덧 아담한 포구에 닿았다. 오밀조밀한 집들이며 항구에 닻을 내린 어선들 하며 모두가 평화가 여기있다고 웅변한다. 이 부두에서 상면한 사람이 제주중 졸업하고 ‘내가 부르던 이름이여! 허공에 산산이 흩어진 이름이여’가 아닌 불러본 적 없는 이름이여! 기억에 새겨본 적 없는 이름이여! 그 이름 박시규 친구였다.

회장이 전날 졸업반 명부에서 찾아 묻고 수소문해서 연락했다고 하나 도무지 기억을 되살리지 못하는 친구 박시규, 그가 부두에서 손을 흔들며 서있는데 저 친구 내 동창이구나 하는 상념이 머리를 스쳤다. 아니나 다를까 내리고 말을 걸어보니 제주중 10회 졸업 동창이 맞다. 그도 안고 우리도 안고 얼씨구 덩실 춤을 추었다. 노인네들이 저 무슨 꼴이람 하는 시선도 아무 장애가 되지 못했다.

그 친구 너무나 씩씩하고 그 동네 유지로 제중이 교훈 명륜(明倫)을 그 지역에 전파하며 살고 있음을 볼 때 정말 자랑스러웠다. 우리들 16명을 억지로 다방으로 데리고 가서 차대접을 하고 최영장군 사당이며 관광지를 안내하고 식당도 예약해주었다. 그 친구 말인즉 동창을 만나니 얼마나 좋은지 구름 위에 뜬 기분이라고 했다. 이보다 더 훌륭하고 진솔한 마음의 표현이 있을 수 있을까? 집사람과도 동창들이 오니 만사 제치고 만나러 가야 한다고 말해주고 왔단다.

아늑한 자연항이 있어 어업이 주생계로 살아가지만 요즈음은 옛날보다는 낫지만 그 옛날 노젓는 낙배로 고기를 잡고 교통이 불편해서 판로도 순조롭지 못하고 풍랑이 일면 생명을 바다에 묻던 시절에는 그 얼마나 고단했었을 것인가. 박시규 그대도 불굴의 사나이구나! 바다를 터전으로 살아온 추자민, 더욱 풍성하고 평화롭고 행복하기 바란다.

오후 4시 좀 지나 하루 외출의 목적지인 추자를 뒤로 하고 핑크 돌핀스에 몸을 실었다. 박시규 그 친구 끝까지 손을 흔든다.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정말 정다웠던 시간, 뜨거운 가슴으로 포옹했던 기억, 오래 오래 건강하고 행복하고 가문의 번영을 비는 마음 추자 대서리 부두에 서 있는 박시규 친구에 바쳐두고 노스탈지어의 손수건을 흔들었노라.

다시 우리는 끝간데 모르는 망망대해에 떠있다. 모두가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하여 마음고생 육체적 피로를 달고 살았지만 그 중 고항림 친구의 말 또한 내 마음을 감동시킨다. 동생이 다섯명 자기까지 6남매 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시고 어머니는 자기가 결혼해 얼마 안있어 아버지 곁으로 가버리니 20대 초반 어린 나이에 형제 다섯을 거느린 가장이 되어 있었다.

농부의 아들로 별 수입도 없고 재산도 변변치 못한데 젊은 새색시가 5명의 시동생의 생계비, 학비는 물론 제사명절, 친족·이웃간에 대소사를 다 알아서 하게 되었다. 고된 짐을 지고 남의 눈을 의식하지 않고 어떻게든 살아야 된다고 앞만 보고 밤을 낮 삼고 달려오는데 그 위에 자식이 3남매가 생기니 대·소변을 어떻게 가렸는지 분간이 되지 않을 지경이었다.

이 어려움을 다 그곡했다. 동생도 모두 결혼까지 시켜 딴살림을 내놓고 자기자식도 결혼시켜 내놓았단다. 젊음도 낭만도 모두 삶 속에 묻었다. 이것이 젊음이구나, 이것이 낭만이구나 하는 것은 생각도 못해봤단다. 이제 남은건 아파서 자주 자리차지하고 싶은 병든 몸이란다.

이 친구는 늘 부인에게 미안하단다. 왜 아니 그렇겠는가. 남편 잘못 만나 그 고생을 했구나. 아름다운 인생을 누릴 수도 있었는데 어린 나이에 대식구 거느린 주부로서 고생고생 말이 고생이지 그 실상을 필설로 다 말할 수는 없는 일이다.

이제는 부인의 말을 다 받아주고 하고자 하는대로 반대하지 않는단다. 너무나 고마워서 그리고 성질을 건들면 실신한단다. 살아온 길이 형극이고 할퀴고 찔린 상처가 너무 많아 그럴 것이다.

뒤돌아보고 도지면 큰 일이라는 것을 이 친구 잘 알아서 사랑과 고마움으로 대하고 있노라는 것이었다. 이 친구같이 따스한 사랑과 보살핌을 주었기에 그대로 참으며 살아왔을 것이고 아무리 그래도 요즈음 세상에 그런 여자가 그리 흔할까?

보따리 싸는 사람이 많으면 많았지, 눌러 살면서 자기 몸 다바쳐 희생과 봉사로 일관할 착하고 인내심 있는 여자는 찾기 쉽지 않으리. 고항림 친구 마을 듣다보니 제주항에 다 다달았다.

그 친구와 부인께 정말 ‘장하다’ 하는 말을 드리고 싶고 진심으로 여생을 행복하게 지내길 바랐다. 제주항에서 내릴 때는 갈 때보다 더 돈독한 우정을 가슴 마다에 품고 모두가 건강하기를 바라면서 작별인사를 나누었다. 아름다운 우정을 나누고 속사정을 털어놓고 들어주면서 이해할 수 있음은 동창이라는 인연이 있고 그 확인은 하루나들이의 즐거운 행사가 증명하였다.(2006. 6. 10에 있었던 일)

나들이를 함께 갔던 정다운 동창 이름
부남돈, 부춘석, 고한구, 강훈일, 양부규, 이좌성, 강희수, 홍순민, 고성일, 고항림, 강원실, 김방규, 송재희, 박청식, 신민식, 진찬훈, 김창기, 강희수, 문상오, 현태식(무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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