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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대영 칼럼](54)황무지-제I장 죽은자의 매장
[양대영 칼럼](54)황무지-제I장 죽은자의 매장
  • 영주일보
  • jeju@newslinejeju.com
  • 승인 2016.05.08 2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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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무지

-T. S. 엘리엇-

제I장 죽은자의 매장

4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은 자라고
추억과 정욕이 뒤엉키고
잠든 뿌리는 봄비로 깨어난다.
겨울은 차라리 따스했다.
대지를 망각의 눈으로 덮고
메마른 구근(球根)으로 작은 생명을 키웠으나,
여름은 난데없이 소나기를 몰고 슈타른베르거 호수를 건너와
우리를 놀라게 했다. 우리는 회랑에서 잠시 쉬었다가
햇빛 속을 걸어 공원으로 가서
커피를 마시고 한 시간 동안 이야기했다.
난 러시아 사람은 아니에요, 출생은 리투아니아지만 진짜 독일 사람인걸요.
어렸을 때 4촌인 태공집에 있었을 적엔
그가 저를 썰매에 태워 줬는데
나는 무서웠어요. 그는 마리,
마리, 꼭 붙잡아 하면서 쏜살같이 내려갔어요.
산 속에선 그야말로 자유로웠지요.
밤에는 대개 책을 읽고, 겨울엔 남쪽으로 옮겨 가지요.

이 얽힌 뿌리는 무엇이며, 이 자갈 더미에서
무슨 가지가 자란단 말인가? 사람의 아들이여,
그대는 알기는커녕 짐작도 못하리라.
부서진 우상의 퇴적(堆積), 거기엔 해가 쬐어 대고
죽은 나무에는 그늘도 없고,
귀뚜라미의 위안도 없고,
메마른 돌 위엔 물소리도 없다. 다만
이 붉은 바위 아래 그늘이 있을 뿐,
(이 붉은 바위 아래 그늘로 들어오라)
그러면 나는 아침에 너를 뒤따른 그림자나
저녁에 너와 마주서는 그림자와는 다른
그 무엇을 보여 주리라.

한 줌 먼지로 죽음의 무서움을 보여 주리라.
바람은 산산하게
고향으로 부는데
아일랜드 우리님은
어디 있느뇨?
“당신이 1년 전 처음으로 히야신스를 저에게 주셨지요.
그래서 다들 저를 히야신스 아가씨라 불렀답니다.”
―그러나 이슬에 젖은 머리칼에, 꽃을 한 아름 안은 너와 더불어
그 히야신스 정원에서 밤 늦게 돌아왔을 때를
나는 말도 못했고 눈마저 멀어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니었다.
다만 빛의 한가운데, 그 정적을 들여다보았을 뿐이었다.
바다는 황량하고 님은 없네.

천리안(千里眼)을 가졌다는 유명한 소소스트리스 부인은
유럽에서 가장 슬기로운 여자로 알려져 있다.
독한 감기에 걸렸지만 그래도
트럼프 점을 친다던 부인, 그녀의 말―
여기 당신의 패가 나왔는데 익사한 페니키아 뱃사람이오.
(보세요! 그의 눈은 진주로 변했지요.)
이것이 벨라도나 암혈(巖穴)의 여인,
역경의 여인,
이것이 지팡이 셋 짚은 사나이, 이것이 바퀴,
그리고 여기 있는 것이 애꾸눈 상인인데, 이 공백의 카드는
그가 짊어지고 가는 것이지만
내가 보지 못하도록 되어 있어요.
그 교살(絞殺)당한 사나이는 보이지 않는군요, 몸 조심하세요.
수많은 사람들이 원을 그리며 돌고 있군요.
또 오세요. 만약 에퀴톤 부인을 만나거든
천공도(天空圖)는 내가 가져간다고 전해 주세요.
요즈음은 하도 험악하니까요.

허무한 도시,
겨울 새벽의 누런 안개 속을
수많은 군중들이 런던 교(橋)위로 흘러갔다.
나는 죽음이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망쳤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이따금 짧은 한 쉼을 내쉬면서
사람마다 발치만 보면서 갔다.
언덕길을 올라서 윌리암 왕가(王街)로 내려서면
성(聖) 메리 울노드 사원의 때를 알리는 종소리가
예배 시간을 알리려 아홉 번 자지러지는 소리를 쳤다.
거기서 나는 친구를 만나 소리쳐 그를 불러 세웠다. 스테츤!
자네, 밀라에 해전(海戰)에서 나와 같이 있었던 친구로군.
작년에 자네가 뜰에 심은 시체에선
싹이 트기 시작했는가? 올해는 꽃이 필까?
또 난데없는 서리가 묘상(苗床)을 망쳤는가?
아, 개를 멀리하게. 비록 인간의 친구라 해도.
그렇지 않으면 그놈이 그것을 다시 발톱으로 파헤칠 걸세!
―그대! 위선의 독자여! 나의 동포―
나의 형제여!

 
T.S.엘이엇(1888-1965)은 미국 출생의 영국 시인. 1948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황무지’는 엘리엇의 대표작으로 제1차 세계대전 후의 유럽의 황폐를, 유럽인의 정신적 황폐에 의해서 조명했다. 엘리엇은 거리에서 만난 친구에게 ‘이 얽힌 뿌리는 무엇이며, 이 자갈 더미에서/ 무슨 가지가 자란단 말인가?’라고 묻는다. 그러나 죽은 자의 시체에서 어떤 문명의 싹이 트며, 어떤 꽃이 필 것인지는 유럽 문명의 과거의 전통을 지켜보며 절망 속에서 헤매는 인간들의 회화며, 유희며, 비즈니스며, 전설이며, 미신을 주의깊게 관찰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1922년에 발표된 ‘황무지’는 <제Ⅰ장 죽은 자의 매장, 제Ⅱ장 장기, 제Ⅲ장 불의 설교, 제Ⅳ장 수사(水死), 제Ⅴ장 뇌신(惱神)의 말>로 이루어진 433행의 장시이다.

첫머리의 ‘4월은 가장 잔인한 달’, ‘사람의 아들이여,/그대는 알기는커녕 짐작도 못하리라’에서 시작되는 폐허 속의 인간 내부의 이미지, 따라 붙는 죽음의 이미지는 의미 심장하다. 엘이엇이 제1차대전 후의 유럽의 황폐를 영탄이나 비탄조로서가 아니라, 인간 내부의 세계를 통찰한 폭력적인 암흑의 메카니즘으로써 체험하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으리라.

첫 부분의 시구는 433행에 이르는 장시 황무지의 모두를 장식할 뿐만 아니라 독자를 황무지의 풍경속으로 몰아넣는다. ‘4월은 가장 잔인한 달’이라며 ‘겨울은 차라리 따스했다’고 말한다. 이 표현은 극히 역설적인 표현이지만, 이것은 단순한 역설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황무지 전편에 흐르는 테마를 뚜렷이 나타내고 있다. ‘황무지인 현대에 있어서 자각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가 이 시의 전반적인 테마가 아닐까 한다.

우리의 기업, 정치, 사회, 문화, 윤리와 도덕 전반에 걸쳐서는 어떤가? 느끼는 소회가 다름 아닌 ‘황무지’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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