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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청비](29) 가을 스케치
[자청비](29) 가을 스케치
  • 이을순
  • news@newslinejeju.com
  • 승인 2021.10.14 10:0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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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을순 소설가
이을순 소설가
▲ 이을순 소설가 ⓒ뉴스라인제주

고추 농사가 끝나자 쪽파 농사로 이어진다. 아침부터 인부들과 함께 쪽파 씨앗을 심다 보니 어느새 하루의 해가 저문다. 구부정한 허리를 폈을 때 느끼는 노동의 대가는 풍족하다. 이제 비로소 농부의 아내가 된 기분이다. 물론 황소처럼 일하는 남편에 비하면 나의 노동력은 새 발의 피이지만 말이다. 그래도 이렇게라도 도울 수 있는 삶이 내겐 그저 감사하기만 하다. 땀을 흘린 만큼 그 대가는 반드시 돌아오는 법이니까. 지난 두 달 반가량 나는 남편을 도와 열심히 고추를 따고, 깨끗이 씻고, 건조한 고추를 방앗간에서 고춧가루로 만들었다. 감사하게도 지난해에 이어 고춧가루를 주문해주신 지인들 덕분에 올해도 완판할 수 있었다.

지금은 한가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그래서인지 어디론가 떠나고 싶어진다. 파란 하늘에는 수시로 비행기가 날아들고 있고, 사방에선 시원한 바람이 불어온다. 나는 무작정 차의 핸들을 잡고 거리를 달려본다. 인생이란 구름은 오늘도 변함없이 흘러가고 있다. 불현듯 비릿한 바다 내음이 그리워지자 얼른 차의 핸들을 해안가 쪽으로 돌린다. 이런 일상의 소중함을 깨닫게 된 것은 농부의 아내가 된 후부터다. 육신이 병들기 전에 자연의 향기를 맘껏 누리고 싶다는 간절함이 나이가 들수록 더해지고 있다. 남은 삶에 대한 애착인지도 모른다.

바닷가 근처에 차를 세워두고 근처 카페에서 커피를 사들곤 방파제 아래 계단에 앉아본다. 바닷바람이 온몸 깊숙한 곳까지 스며든다. 나는 혼자의 시간을 즐기며 커피를 마시면서 먼바다에 시선을 내던진다. 지금 내가 찾고 있는 건 창작의 곳간이 아니라, 삶의 곳간이다.

코로나19 사태는 전 세계는 물론 개인의 삶까지 완전히 바꿔놓았다. 저금리 시대에 미국은 경제 대공황을 막기 위해 엄청난 달러를 찍어내어 자국민에게 나눠주었다. 그 많은 돈은 부동산, 주식 투자에 흘러 들어가 투기라는 뜨거운 불을 활활 지폈다. 이제 전 세계는 대출금리를 올리고 있다. 그에 따른 경제 후유증이 어떻게 나타날지 그 누구도 알 수가 없다. 여태껏 한 번도 가보지 않던 길을 걷고 있으니 말이다.

우리 정부도 마찬가지다. 코로나19 사태로 자영업자를 비롯한 국민에게 여러 번 돈을 나누어 지급했다. 그 때문에 국가 부채는 산더미처럼 쌓였고, 저금리로 인해 부동산은 하늘을 찌르듯이 치솟았다. 경기가 둔화된 상태에서 투기장만 더 뜨거워졌다. 마침내 화폐 가치는 떨어지고 물가는 올라 사람들의 소득이 감소하는 인플레이션 현상을 맞고 말았다. 설상가상으로 미국 연준에선 11월에 테이퍼링을 시작해서 내년 상반기까지 끝내겠다고 선언했다. 은행들은 저마다 대출 규제에 나섰고, 대출금리도 야금야금 올렸다. 한은은 앞으로 몇 차례 금리를 더 올릴 것이라고 한다. 심각한 가계부채 사태로 정부도 더는 어쩔 수가 없는 모양이다. 나도 정신 줄을 꽉 잡을 수밖에 없다.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남의 일처럼 느껴지지 않아서다. 유튜브에선 부를 거머쥘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떠들어댄다. 주식 전문가들은 지금이 저점인 주식들을 사들일 좋은 기회라고 구독자들을 부추긴다. 그 말에 내 마음도 덩달아 흔들린다. 하지만 주식 투자는 쉽지가 않다. 그 분야를 전혀 모르는 초짜가 월가를 상대로 게임을 해서 돈을 벌겠다는 건 위험한 발상이다. 자칫하면 가진 돈마저 탈탈 털려 빈곤으로 추락할 수도 있다. 덜컥 겁이 난다. 그래서 어제, 외도 양돈농협 건물에 나붙어 있는 현수막에 정기적금 이자 4%라고 쓰인 광고 현수막을 보고 3년 만기 정기적금에 가입했는지도 모른다. 이런 내 모습에 스스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언제부터 내가 이처럼 알뜰한 살림꾼으로 변한 것일까.

언제 끝날지 모를 불안한 정체 국면. 며칠 전, 한국의 영양실조 사망통계가 나왔다. 최근 10년간 전국에서 776명이 사망했다고 한다. 또 무료 급식소가 문을 닫는 바람에 빈곤한 노인들은 하루 한 끼를 먹으며 겨우 버틴다는 기사도 있다. 코로나19 델타 변이 바이러스가 전 세계 인간들의 목을 바짝 옥죄이고 있다. 이런 대혼란 속에서 정부는 이르면 다음 달 둘째 주부터 단계적 일상회복 전환을 위한 ‘위드 코로나’ 준비를 본격화할 것이라고 보도한다. 정말 우리들의 삶이 예전처럼 돌아갈 수 있을까? 또 내년 대선이 끝나면 우리나라 경제는 어떻게 될까? 이런저런 막연한 불안감을 서투른 솜씨로 저 가을 하늘에 스케치해본다. 그러면서 다시 깨닫게 된다. 내가 갈 길은 창작의 곳간과 현실적인 삶의 곳간, 그 중도에서 인내하며 묵묵히 걸어가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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