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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상금의 시방목지](38) 순비기꽃
[문상금의 시방목지](38) 순비기꽃
  • 문상금
  • news@newslinejeju.com
  • 승인 2021.09.20 14:4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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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상금 시인

‘이른 새벽에 늘 깨어있는 나처럼 일찍 피어나는 꽃, 짠물을 뒤집어써도 곱게 피어나는 꽃, 바다 향한 첫사랑으로 모래 위를 기어서 악착같이 피어나는 꽃, 제주 해안선을 한 바퀴 빙 돌아 온통 연보라 그리움으로 칭칭 휘감으며 피어나는 꽃’

순비기꽃
 

문 상 금
 

오늘 내가 뿌리 뻗어가는
흰 파도 세찬 바닷길은

틀린 길일 수도 있고
맞는 길일 수도 있고

불완전한 길일 수도 있고
완전한 길일 수도 있고

걷는 길일 수도 있고
뛰는 길일 수도 있고

오롯 그 자리에서
모래에 묻은 염분을 빨아먹으며
바닷길로 뻗어나가는 그녀

형벌 같은
짜디짠 그리움 향한 길
 

-제5시집 「첫사랑」에 수록
 

문상금 시인
▲ 문상금 시인 ⓒ뉴스라인제주

나는 바다를 ‘어머니의 자궁’이라 부른다. 가끔 미역귀 같은 쫀득쫀득한 짠맛이 그리울 때, 양수 가득한 아늑한 자궁속이 그리울 때, 바다로 간다. 가깝거나 혹은 멀거나 에메랄드빛 깊고 얕은 바다를 볼 수 있다는 것은 기쁨이다.

우르르 보목바다로 갔다, 동쪽 끝 ‘볼레낭개 할망집’에서 고사리와 고메기를 잔뜩 넣어 푹 끓인 고사리 고메기 찌개와 홍어전을 먹었다. 고사리 고메기 찌개에서는 깊고 비릿한 바다냄새가 났고 홍어전은 혀끝이 톡 쏘면서 마치 온몸에 전류가 흐르듯 움찔움찔 콧구멍과 대장이 뻥 뚫렸다.

고사리 고메기 찌개 국물까지 훌훌 다 털어 먹은 다음, 홍어전을 한 점씩 먹고 바다를 바라볼 때마다, 바다도 혀끝이 톡 쏘이는지 술에 취한 것처럼 마구 흔들렸다. 희고 뽀얀 살결을 열고 마구 달려들었다. 배 후미에 따라붙는 물갈기처럼, 이팝나무 가지마다 피어난 밥알 같은 흰 꽃처럼.

‘파도는 살아서 살지 못하는 것의 넋/ 파도는 피워서 피우지 못하는 것들의 꽃’이라는 이생진 시인의 ‘그리운 바다 성산포’ 시 한 구절이 자꾸만 떠올랐다.

나도 자꾸만 흔들렸다. 흔들리면서 흰 파도 앞에 섰을 때는 마구 어지러웠다. 온몸이 움찔움찔, 발가락에서부터 머리끝까지, 간질간질 간지럽더니 온통 비늘이 돋기 시작하였다. 악착같이 따라붙는 짠맛의 가려움 따라 모래톱에 누워 뒹굴기 시작하였다. 한 바퀴 두 바퀴 그 푸른 해안선 따라 뒹굴 때마다 푸르죽죽한 진물의 비늘들이 하나씩 떨어졌다. 뚝뚝 비늘이 떨어진 자리마다 꽃들이 피어났다.

아, 연보랏빛 그리움, 순비기꽃이 피어났다.

아아, 형벌처럼, 형벌처럼!

틀린 길일 수도 있고 불완전한 길일 수도 있지만, 짜디짠 바다 향한 그리움의 길.

저 세상에 가서도 바다에 살자, 순비기꽃 되어 살자. 푸른 바다가 없으면 이 세상으로 도로 기어와서 바다에 살자, 외로운 바닷가 순비기꽃으로 피어나자.

흰 파도 세찬 바닷길 따라 피어나자. 연보라 그리움으로 살자. [글 문상금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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