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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상금의 시방목지](37)하늘애기
[문상금의 시방목지](37)하늘애기
  • 문상금
  • news@newslinejeju.com
  • 승인 2021.09.13 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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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상금 시인

‘제주 돌담에 걸려있는 하늘애기, 집 입구에 걸어두면 나쁜 기운을 막아주었다, 종일, 나도 돌담이 되어, 그 푸른 줄기 하나가 뻗어오길 기다렸다, 흰 실타래 꽃이 피고, 꽃이 지고, 푸른 열매, 노란 열매, 주렁주렁 열려 하늘 끝까지 날아오를 수 있기를 손 모았다 ’
 

하늘애기
 

문 상 금
 

내가 늘 앉아 있곤 하던 생각의 돌을 며칠 게으름을 피운 사이 단숨에 점령해버렸다 그리곤 그림자 하나 없는 정오에 실타래 같은 하얀 꽃잎들을 뿜어내었다 한낮에 누가 꾸는 걸까, 하늘 향해 날아오르는 꿈을, 잎을 헤집으면 줄줄이 달려있는 열매들, 그 녹색(綠色)의 튼실한 꿈들

무수한 여름을
품고,

이렇게,
한 세상 살아가는 것
 

-제4시집 「꽃에 미친 女子」에 수록
 

문상금 시인
▲ 문상금 시인 ⓒ뉴스라인제주

노루 꼬리마냥 차츰차츰 짧아져 가는 구월에도, 한낮엔 여전히 뜨거운 열기가 오르락내리락 하는 구월에도 힘차게 뻗어나가는 푸른 줄기가 있다, 실타래 같은 흰 꽃이 있다, 작은 돌들 큰 돌들을 단숨에 뒤덮어 버리고 돌담 옆 삼나무를 타고 올라간 하늘하늘 하늘애기.

실타래, 흰 눈가루 같은 실타래를 보았다. 한때 인사동(仁寺洞) 길 따라 줄지어 늘어선 화랑을 둘러보는 것을 좋아하여 가끔 인사동을 갈 때면 눈길을 사로잡는 것이 있었다. 그래서 맨 먼저 항상 그 곳을 들리곤 하였다.

비보이(B-Boy) 같은 건장한 청년 셋이서 태극기 무늬가 들어간 두건을 쓰고 마치 가래떡 같은 엿가락을 손에 들고 있었다. 엿 주문을 하면 경쾌한 음악에 맞추어 마치 거미가 항문 근처 방적돌기에서 실을 뽑아 거미줄(거미집)을 짓듯, 청년들은 손을 움직여 흰 실을 뽑아내어 실타래를 만들기 시작하였다. 굵직하던 엿가락이 아주 가느다란 미세한 눈 입자 같은 그러나 실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그 실타래의 여정을 어린아이마냥 신기한 눈빛으로 지켜보고 있노라면 마치 ‘겨울왕국’ 이나 ‘설국’ 같은 펄펄 휘날리는 하얀 눈의 세계로 한 발 한 발 걸어 들어가는 것 같았다.

‘한 번 해보실래요?’하도 열심히 구경해서 그런가, 종종 이런 말을 듣곤 한다, ‘아뇨, 끊어질 것 같아서...’ 흰 설탕을 넣고 나무젓가락 빙빙 돌리며 솜사탕은 여러 번 만들어 보았지만, 솔직히 달인 정도나 되어야, 저렇게 실을 곱게 뽑을 수 있는 것이지, 그리고 손이나 팔의 힘이 어지간히 있어야 하겠지, 이 세상에 쉬운 일이 있겠는가, 그저 열심히 구경하고 그 부드럽고 달콤한 맛을 보는 것으로 만족할 뿐이다.

실제로 그 청년들 등 뒤로는 ‘생활의 달인’ ‘KBS, MBC 출연’ 등등 화려한 묘기 사진들이 쭉 전시되어 있었다.

이 순백의 섬세하고 부드러운 솜실 같은 느낌을 만난 적이 있었다, 어디서 만났을까, 아하, 드디어 알아내었다. 우리 집 근처는 비가 내려야만 물이 흐르는 건천(乾川)을 따라 오래된 삼나무며 소나무 그리고 왕벚나무들이 도열해 있고 사시사철 꽃피고 푸르렀다.

그 나무들 옆, 귤 밭에는 오래된 지붕 위에 자연 환기통이 서너 개 있는 큰 감귤창고가 있어서 풍경이 참 아름다웠다. 그 아름다운 풍경을 사랑하여 종종 산책을 나갔는데, 그 길 중간에 큰 돌들이 군데군데 놓여 있었다. 그 돌중에 하나를 나는 ‘생각의 돌’이라 불렀다. 그 돌에 앉아서 하늘이며 흘러가는 구름이며 산들산들 불어오는 바람을 느끼고 있노라면 많은 좋은 생각들이 떠올랐다. 시를 쓰기도 하였다.

그러다 한 일주일 정도 못가다 간적이 있었는데, 그 ‘생각의 돌’을 짙은 초록의 양탄자가 뒤덮고 있었다, 그 양탄자는 한가득 하늘하늘 흰 실타래 같은 꽃들로 수놓아져 있었다. 바로 하눌타리 꽃이었다.

하늘수박인 하눌타리는 꽃과 열매가 모두 예뻤다. 초록 잎은 특이한 단풍잎 부채손 같은 모습이었다. 줄기에는 용수철 같은 손들이 무수히 있었는데, 하늘로 뻗어 올라가 하늘을 향해 꽃을 피웠다. 하늘을 사모하는 것인가 아니면 태양을 사모하는 것인가, 아마 하늘일 것이다. 그래서 이름도 하늘을 향해 머리를 풀어헤친 타리라 하여 하눌타리라 불리었다.

덩굴식물인 그것은 하얀 실, 긴 갈기 같은 꽃이 미처 지기도 전에 씨방이 커지면서 열매를 키우고 있었다. 제주 들녘 돌담이나 냇가나 나무들을 타고 오르는 흔하디흔한 그것들은 하늘애기 또는 하늘레기 라고도 불리었다. 흔하고 잘 자라는 것에 비해 뿌리는 귀한 약재로 쓰였다.

우와, 이런 무지막지한 정복자가 있다니, 감히 시인이 아끼는 돌을 뒤덮어버리다니.

나는 잎이나 꽃이 다칠까봐 차마 ‘생각의 돌’에는 앉아보지도 못하고, 흰 꽃이 피고지고 애기수박 같은 열매가 주렁주렁 열리고 늦가을 그 무성했던 잎들이 다 지고 난 뒤에도 노란 열매들이 탱글탱글 한겨울까지 남아있는 그 돌 주변을 맴돌 뿐이었다. 그러다 귀가할 때는 노란 하늘애기 열매를 서너 개, 이제는 다 말라가는 줄기째 따다, 우리 집 돌담위에 걸어놓곤 하였다.

‘하늘애기.1’ ‘하늘애기.2’ 두 편의 시가 씌어졌다. 내가 시를 쓰는 동안 그것들은 노랗게 말라가다가 검버섯 같은 짙은 갈색이 되어가다가, 어느 순간 돌담 아래로 툭 떨어져 흙으로 돌아갔다. 꽃이나 사람이나 이렇게 한 세상 살아가다, 환하고 고왔던 모습들은 흙빛이 되어가며 툭 목숨 지는 것이다.

흙으로 돌아가며 이 세상 나쁜 기운, 어두운 기운들을 한바탕 몰고 갔는지, 하늘은 더 짙고 푸른빛으로 오래도록 머물렀다. [글 문상금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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