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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상금의 시방목지](36)질경이
[문상금의 시방목지](36)질경이
  • 문상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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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1.09.06 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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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상금 시인

‘밟힐수록 더 강해지는 기특한 것들, 변함없이 그 자리에서 피고 지는 조그만 꽃들, 매순간 최선인 것들, 그래, 질경이도 내게 고운 영혼 보여주고 싶어, 저렇게 발돋움하며 피어나는 걸 거야
 

질경이
 

문 상 금
 

납작
엎드린다

너무나 익숙한
포복 자세

발길에 사정없이 밟히고
실연을 당하고
손가락질을 받는다 할지라도

세상의 진흙 속
어둠을 딛고
더 빛을 발하는

 

-제2시집 「다들 집으로 간다」에 수록
 

문상금 시인
▲ 문상금 시인 ⓒ뉴스라인제주

열 살 무렵, 이상하게도 초등학교를 가는 길 중간에는 늘 누런 황소 한 마리나 두 마리가 고삐에 매인 채로 풀을 뜯고 있었다, 그리 넓지 않은 길목엔 내가 지나갈 길의 여백이 좁았고 그 좁은 여백엔 엉겅퀴 가시 같은 온갖 야생 잡초들이 풀숲을 이루어 아침마다 이슬이 맺혀 있었다.

이른 아침에 제일 먼저 학교에 도착하고 싶었지만 누런 황소들이 하필이면 길목에 떡 버티고 있을 때는 차마 무서워 지나갈 수가 없었다. 할 수 없었다, 누군가 지나가는 어른들이 있을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멀찌감치 서서, 발을 동동 구르며 서성이며 그 두려움의 존재인 황소의 뿔과 코뚜레와 코뚜레가 낀 채로 콧물이 흘러내리던 둥글고 큰 코와 입을 관찰하곤 하였다, 그 코와 입을, 날름 나왔다 날름 들어갔다 하는 황소의 크고 길고 두꺼운 혀가 참 신기하였다.

소는 혀로 왜 입을 핥다가 쑥 코를 핥는지 지금도 잘 모르겠다, 엉덩이와 소똥 주위를 맴도는 왕파리들, 그 왕파리들을 근육질의 꼬리로 찰싹찰싹 때리며 쉬지 않고 길가의 어린 풀들을 맛있게 뜯어먹던 황소들, 그 육중하고 얄밉던 황소들.

나는 길가를 서성이며 황소를 관찰하다가 어린 풀 위를 발을 동동 구르다가 또 쪼그려 앉아 있었다. 애꿎은 그 어린 풀들을 잡아 뜯으며 시간을 죽이고 있노라면 저 멀리서 이웃집의 할머니나 할아버지가 마실을 가려는지 걸어오시는 것이 보였다. ‘학교 아직 못 갔네?’ 하시는 말씀을 들으며 괜히 눈물이 펑펑 쏟아졌다, 그 할머니나 할아버지 옆에 찰싹 붙어서 바람인 척 ‘휙’ 하고 황소 곁을 지나노라면, 황소는 여전히 꿈쩍도 안 하고 입만 오물오물, 얄밉도록 되새김질을 하는 것이었다.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들도록 그런 일은 여러 번 있었고 결국은 아버지한테 애기를 하였다, 그 소 주인한테 말을 전하였는지 아니면 팔려 나갔는지 그 후로는 황소를 만난 일이 없다.

콧노래를 부르며 학교를 가고 있던 가을에, 내가 황소와 조우(遭遇)할 때마다 동동거렸던, 발밑에서 짓밟히고 또 거친 손에 잡아 뜯기던 풀에서 길쭉한 줄기인지 꽃인지가 마치 봄날 어린 송순 같이 돋아나고 있는 것이었다. 또 며칠 후에는 그 길고 불쑥 솟은 꽃대에서 작고 여린 흰 꽃들이 피어 있었다. 바로 그 풀은 질경이였으며 그 흰 꽃은 질경이 꽃이었던 것이다,

그 어린 질경이 잎은 쌈으로도 먹을 수 있고, 뿌리와 줄기까지도 약용으로 쓸 수 있다는 차전초(車前草)라 한다는 것은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그 아무 보잘 것 없이 땅바닥을 뒹굴며 뿌리 내려도 악착같이 질기고 강하게 잘 자란다하여 이름이 질경이인가.

이후로는 어느 시골길 조용한 곳에서 자라는 질경이가 보일 때마다 잎을 따다가 민들레 잎과 같이 몇 번 쌈을 싸 먹기도 하였다.

순하고 부드럽고 소화가 잘되는 그런 풀이었다, 그 질경이 보잘 것 없는 잎들은 우리 몸속으로 들어와 죽어있는 원기를 회복해 준다니, 얼마나 반짝반짝 빛을 발하는 보석인가.

화가 이중섭은 고향인 원산에서 소도둑으로 몰릴 만큼 소를 자주 관찰하였다. 또 1951년도에 서귀포로 피난을 와서도 일 년이 채 안 되게 거주할 때도 소에 관심이 많았다. 그 이중섭 거주지 서쪽에는 크고 작은 농가들이 있었다. 그 농가 앞 골목에 묶여 있던 누런 황소도 뚫어지게 관찰하였다. 당시 서귀포에는 따로 외양간이 없이 집 앞 골목에 소를 묶어두곤 하였다. 그래서인지 당시에 소도둑이 많았다 하는데, 소 주인이 ‘왜 남의 소를 계속 쳐다보느냐?’하는 등 싸움도 있었다고 아윤선생은 말씀하신다.

또 정방폭포 가기 전, 소암기념관 동쪽에 당시에는 정모시에서 내려온 물로 물레방아를 돌려 도정(搗精)을 하였다. 그 물방아 옆으로 2층 주택(적산가옥)이 들어섰는데, 주민들 사이에 ‘백만 원짜리 돌집’이라 불리었을 정도로 고급 주택이었고 현재 물방아는 없지만 당시에 지어진 주택은 남아있다.

그 물방아터 부근은 온통 풀밭이어서, 소들이 한가로이 풀을 뜯어 먹곤 하였고, 이중섭은 풀밭에서 풀을 뜯는 소를 당시 소꼴을 베던 중학생들과 가까이에서 바라보며 몇 마디 말도 하며, ‘황소’ 그림을 스케치하였다 한다.

나는 이중섭의 ‘황소’나 ‘흰 소’ 그림을 좋아한다. 그 날렵하고 힘찬 기상과 늠름한 형상을 아주 좋아한다. 그러나 어린 시절 그 길가의 황소의 기억은 늘 두려움의 대상이었기에 나는 황소에 대한 시는 쓰지 못하였다, 다만 발을 동동거리며 보석인 줄 모르고 괜히 뜯어내며 화풀이했던 그 풀들을 위로하며, 짧은 시를 써주었다. 2002년 ‘서귀포문학’에 발표하고, 제2시집 ‘다들 집으로 간다’에 수록하였다. [글 문상금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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