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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상금의 시방목지](34)연잎차를 덖으며
[문상금의 시방목지](34)연잎차를 덖으며
  • 문상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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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1.08.23 1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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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상금 시인

‘연꽃 필 때, 연꽃 같이 환한 마음, 연잎 같이 둥그런 마음, 그것을 바라보며 어린아이처럼 더 순수(純粹)해지는 마음, 연잎처럼 둥글어지고, 연잎 위 물방울처럼 톡톡, 이 환한 마음 어디에서 왔니?’
 

연잎차를 덖으며
 

문 상 금
 

차(茶)는
첫 손에 잘 볶아져야
제 맛을 낸다

구증구포(九蒸九曝),
아홉 번 덖고 아홉 번 비빈다

빗발치듯 땀을 흘리며
온 몸으로 연잎을 덖는다

마음의 밭을 갈 듯
연잎을 비비며
기도를 한다

무언(無言)의
시간들이 흐르고

간절함이
참으로 많았나 보다

밤새도록 비벼도
연잎은 새파란 그대로다
 

-제3시집 「누군가의 따뜻한 손이 있기 때문이다」에 수록
 

문상금 시인
▲ 문상금 시인 ⓒ뉴스라인제주

시퍼런 치기(稚氣)가 푸른 하늘을 날카롭게 찌르던 십대에 몇몇이 하원동(河源洞에)에 있는 법화사(法華寺)를 찾아간 적이 있었다, 법화사는 고려시대 때 창건된 천년 고찰이다, 넓은 잔디밭 정원과 연못 위로 차츰 회색빛 어둠이 내리고 연보라 빛 어둠이 내리고 점점 더 짙은 보랏빛 어둠이 내리는가 싶더니 느닷없이 시커먼 어둠이 내렸다. 3천 8백여 평 연못엔 연꽃 몇 송이가 피어나고 있었고, 마치 극락정토에 온 것 같은 구품연지(九品蓮池) 한가득 연잎이 무성했다.

다들 연못 구경에 분주할 무렵 나는 남쪽 정원 한가운데에 있는 커다란 동종(銅鐘)이 신기하여 종각을 맴돌고 있었다, 큰 스님이 다가오셔서 ‘한 번 쳐보고 싶으면, 세게 쳐 보셔요’ 하시는 것이었다, ‘정말 쳐봐도 될까요?’, ‘그럼요, 힘껏 쳐 보셔요’, 종각 천정에 줄로 묶인 나무 추를 양손에 쥐고 세게 쳐보았다, ‘쿵’이랄까, ‘텅’이라고 할까, ‘둥’ 이라고 할까, 구리와 나무가 만나서 부딪혀 서로 어루만지고 하나가 되었다, 합일치(合一致)였다, 묵직하고 조용한 소리가 되어 멀리 멀리 울려 퍼졌다, 그 동종 소리는 연꽃 위로 백일홍 붉은 꽃 위로 하늘 위로 퍼져나갔다, 저절로 기도가 올려졌다.

연못 깊은 곳, 수백 년 묵은 연(蓮) 씨앗 하나, 싹 틀 매듭 풀릴 시간을 기다리는, 그 인고(忍苦)에서 왔니, 비로소 종소리를 한 바퀴 돌아 연꽃 앞에 선 나는, 얼굴이 환해지고 마음이 절로 환해졌다.

보살님이 연잎을 뜯어다 깨끗하게 씻어낸 다음 물기를 말리고 연잎차를 만든다고 하셨다, 별 생각 없이, 금방 끝나겠지 하고 돕기 시작하였다, 덖는 것이라 하였다, 달구어진 넓고 두꺼운 솥뚜껑 위에 가늘게 자른 연잎을 깔아놓은 다음에 면장갑을 끼고 비비고 덖고 하였다, 땀이 뻘뻘 나기 시작하였다, 다 덖어지면 깔아놓은 대바구니에 널어 식히고 또 한 차례 덖고 또 식히고, 무려 네 시간 동안, 구증구포(九蒸九曝), 아홉 번 덖고 아홉 번 비비는 것이었다.

이 세상에 쉬운 일은 정말 하나도 없다, 봉지에 연잎차를 넣고 그 향(香)을 맡으니 무어라 표현할 수 없는 감동이 밀려왔다. 그 향은 은은하면서도 잔잔한 불씨를 품고 있었다. 그 숨죽인 열정(熱情)과 무르익음, 간절함이 참으로 많았나 보다.

아홉 번 뜨거운 열기에 덖어지고 비벼질지라도 빛바래지 않고 부서지지 않고 연잎은 그대로 빙긋이 웃고 있었다. 비 오듯 땀 뻘뻘 흘리며 꼬박 비벼댄 것이 당혹스러울 정도였다, 연잎은 새파란 그대로였다, 아니 오히려 더 진하고 선명한 빛깔로 오래도록 남았다.

그 연잎차를, 그 연잎의 선명한 반항을, 그것은 바로 치기어린 십대에 내가 찾아낸 보물 1호였다, ‘나도 선명히 있으리라, 온갖 시련이 나를 연마(硏磨) 시킬지라도 나는 오직 그대로 있으리라’, 차마 그 연잎차를 우려 마시지 못하고, 상자 깊숙이 넣어두었다.

넓은 정원에 솟아나는 시원한 용천수와 연꽃과 붉은 백일홍 꽃을 사랑하여 나는 해마다 법화사를 찾곤 하였다, ‘법화사’와 ‘연잎차를 덖으며’, 두 편의 시가 씌어졌다. [글 문상금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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