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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상금의 시방목지](32) 봉숭아
[문상금의 시방목지](32) 봉숭아
  • 문상금
  • news@newslinejeju.com
  • 승인 2021.08.09 1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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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상금 시인

‘봉숭아는 속울음이다, 붉은 대궁이다, 붉은 손톱이다, 첫 눈 오는 날까지 유효한 설렘이다, 기다림이다, 울담 밑을 고요히 피어나 뱀을 물리친다, 톡톡 씨방을 엄지손가락과 집게손가락으로 지그시 누르면 씨앗들이 사방팔방으로 튀어나간다, 진취적이고 생활력 강하고 전통적인 한국의 여인(女人)을 닮았다’

봉숭아
 

문 상 금
 

눈물이
참 많아졌다

울담 밑에
미친 여자

서너 살짜리
딸 껴안고
떨어질 줄 모르는
한낮

떠도는
질긴 목숨

볼 붉혀
때 이른
등불 하나 켜느니
 

-제2시집 「다들 집으로 간다」에 수록
 

문상금 시인
▲ 문상금 시인 ⓒ뉴스라인제주

한여름 귀가 길에 울담 밑에 피어난 붉은 봉숭아꽃처럼 붉은 목숨들이 앉아있었다, 머리 산발한 낯선 여자와 그 여자의 딸인 어린아이가 가슴을 꼭 끌어안고 앉아 있었다. 마치 그 누가 둘을 떼어놓으려고 했던 것일까, 절대 떨어질 수 없다는 듯, 서로가 서로를 끌어안아 주고 있었다.

참 묘했다,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그냥 지나칠 수도 있었지만, 큰 돌이 작은 돌을 끌어당기고 작은 돌이 큰 돌을 잡아당겨 돌담을 이루듯, 한낮부터 밤이 깊도록 서로 합체(合體)가 되는 그림자들, 그 붉은 목숨들 옆으로 서럽도록 봉숭아꽃은 피어났다.

아니나 다를까, 누군가 지나가다, 마음이 아픈 여자라고 말해 주었다, 그래 차라리 머리가 아프다고 하지 않아서 다행이다, 무슨 사연이 있을까, 얼마나 크고 깊은 상처를 입었는가, 끝내 그 상처를 이겨내지 못하고 머리와 마음을 연줄 놓듯 다 놓아 버렸는가.

종종 마음이 아픈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그 마음이 아픈 사람들을 나는 천사라고 부른다, 착하고 선(善)한 사람들이 마음의 상처를 훨씬 많이 받는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천사가 되지 말라고 차라리 악마가 되라고 말한다. 여기서 악마라는 것은 큰 피해를 받을 정도로 많이 양보하지 말고 악착같이 방어하며 잘 살아가는 존재가 되라는 뜻이다.

긴 머릿결이 탐스럽고 흰 얼굴의 옥미는 중고교시절 내 친구였다, 스물네 살 가을 무렵, 우연히 만난 이후로 그녀는 나를 보러 ‘시사랑’ 커피숍으로 오곤 했다, 나는 늘 하루일과가 끝나고 귀가하기 전에는 ‘시사랑’ 커피숍(1985년부터 1996년 결혼하기 전까지 이용하였음, 1989년 이 찻집에서 아윤선생을 우연히 만나 본격적인 습작기로 들어갔음)에 앉아 있었다. 당시 서귀포에는 ‘로댕’과 ‘미등’ 커피숍이 있어서 가끔 약속이 있을 때는 두 곳을 이용하였고, ‘시’가 들어가서일까, 음악이 좋아서일까, 항상 하루의 마무리는 ‘시사랑’ 커피숍이었기 때문에 자연스레 지인(知人)들이 하나둘 모여들어 이런저런 얘기들을 나누곤 했다.

나는 시나몬(계피가루)과 생크림이 듬뿍 들어간 비엔나커피를 즐겼다, 짙은 커피와 달콤한 생크림 위에 땅콩 조각들 그리고 시나몬 가루 향을 조금씩 음미하고 마시며 책도 읽고 글도 썼다. 옥미와 나는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고, 음악을 들으며 최근에 읽는 책이나 미래에 하고 싶은 것에 대하여 얘기를 나누곤 하였다. 중얼중얼 속삭이듯 얘기하는 그녀의 두 눈은 이상하리만치 빛났고, 불빛 탓일까, 그 얼굴은 핏기가 없어 늘 창백했다, 이십대 중반은 삶의 모색이 필요한 아주 중요한 때였다, 불안하고 생각이 많은가보다, 나는 그러려니 했다.

문득 배고파하는 것 같아서 ‘따뜻한 우유 한 잔 마실래?’했다, ‘그럼... 딸기우유 하나 사주라’ 하는 것이었다, ‘이 커피숍에는 딸기우유가 없어, 그럼 나가서 멸치국수 먹을까?’ 했더니, ‘실은, 나, 흰색은 아무것도 못 먹어, 흰 쌀밥도 못 먹고 흰 우유도 못 먹고 흰 국수도 못 먹어, 그러나 분홍이나 노랑이나 검정은 먹을 수 있어’

도대체 이건 또 무슨 말이야, 나는 비로소 알았다, 그녀는 흰색처럼 자신이 가진 모든 빛을 반사하여 아무런 색도 없는 무채색으로 조금씩 사라지고 있었다는 것을. 나는 매일 분홍색 딸기우유와 노랑 보름달 빵을 미리 사놓고 기다렸다, 그녀는 늘 허겁지겁 먹었다, 그렇게 한 달 후 쯤 정말 그녀는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다, 더 이상 나를 보러 오지 않았다, 집 전화번호도 몰랐다, 옛날 오일장근처에 집이 있다는 것을 들은 적이 있어서, 무작정 집을 찾기 시작하였다, 후비진 골목 끝에서 끝내 아버지를 만날 수 있었다, ‘아, 옥미는 육지로 나갔어’ ‘육지 어디로요? 주소나 연락처 있어요?’‘육지로 간다고 집을 떠났는데, 실은 나도 잘 몰라, 유일하게 외출해서 만났던 그 친구로군’ ‘딸이 집을 나갔는데, 모른다는 게 말이 되나요?’ 바락바락 대들며 악을 썼다, 엉엉 눈물이 쏟아져서 주저앉아 한참을 울었다.

나보다 서너 살 위인 아녜스는 큰 이층집에 부모님이랑 살았는데, 된장국도 잘 끓였고 피아노도 잘 쳤고 시도 잘 썼다. 한양대학교를 재학하다 몸이 아파서 귀향하였다, 어디가 어떻게 아팠는지는 물어보지 않았다. 서귀포에 오자마자 시인들을 스스로 찾아와서 나하곤 거의 매일 만났다, 등단은 안 하고 이미 시집은 출간하여서 나에게도 한 권 주었다, 그 때 나는 스물다섯 살, 갓 등단 초반이라 시집을 받자마자 내리 읽어보았다, 그런데 시집 사이사이에 뭐랄까 썰렁한 상처의 여백이, 미처 부치지 못한 편지 같은 공허함이 가득하였다.

시(詩)들은 지적이면서 차가웠고 따뜻하면서도 외로움이 잔뜩 묻어있었다, 그 당시에 비슷한 또래의 시인이 없었기 때문에 서로가 서로에게 말벗이었고 위안이었다, 집으로 종종 놀러오라 해서 가면, 아녜스는 몸집도 작았고 말랐고 소식(小食)을 하였다, 풋고추를 썰어 넣어 끓인 칼칼한 된장국에 김치와 밥 한 공기를 주었다, 하다못해 멸치 몇 개라도 주었으면, 나는 늘 그 정도로는 배가 고팠다, 그리고 쇼팽이며 베토벤이며 피아노를 연주해 주었다, 스케치도 보여 주었다, 나는 유일한 관객이 되어 박수를 쳐주곤 하였다.

우연히 뜨거운 정오(正午)에 길을 걷다가 한 낯익은 여자의 뒷모습을 보았다, 화단에 핀 꽃잎들을 한 잎 한 잎 어루만져주고 있는, 마치 이 세상과 이별을 고(告)하듯 꽃잎들과 이별하고 있는, 피아노 건반을 달리던 그 흰 손가락의 섬세한 떨림을 느꼈고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 서늘함을, 한낮의 짙은 그림자를, 그 서글픔을 끌어안고 아녜스는 꽃다운 이십대에 세상을 떠났다.

나라고 이 세상이 행복했을까, 상처가 없었을까, 나는 조금도 행복하지 않았다, 단지 또래에 비해 시인이라는 삶의 방향을 조금 빨리 잡았을 뿐이다.

직장에서 업무 처리하랴, 시 쓰랴, 사람들 만나랴, 갓 태어난 조카도 종종 돌보랴, 또 편지는 왜 그리 많이 와 수북이 쌓이는지, ‘시사랑’ 커피숍에도 편지나 선물을 맡겨놓고 가는 사람들이 많았고, 전화 오는 사람들도 많았고, 매일 매일이 전투를 치루는 것 같았다.

나는 여류라는 수식어가 붙는 것을 싫어한다, 1992년 당시에 특히 여류시인이라고 불렀던, 나를 함부로 단정(斷定)지었던, 시인들끼리 만났으면 시 얘기만 해도 시간이 모자랄 판국에, 그때만 해도 보수적이고 권위적인 몇몇 남자시인들의 진부한 사고의 성차별 발언으로 인해 자주 과격한 토론의 날들이 이어졌으며, 하루는 죽었다가 하루는 살았다가 하는, 정말 입술을 질끈 깨물 수밖에 없는, 투쟁이 연속인 나날이었다.

몇몇 시인들도 갑론을박 버티기 어려웠을까, 아마 또 다른 사정들이 있었겠지만, 그 당시 가장 비판적이고 날카로웠던 '깨어있음의 시' 동인으로 시를 쓰던 윤주상 시인은 제주를 떠났고, 태흥리 '애삐리' 바다를 소재로 따뜻한 시를 쓰던 강종완 시인은 끝내 절필하였다.

특히 강종완 시인의 절필선언은 큰 충격이었다. 나보다 네 살 위였던 같은 제주대학교 국문학과 복학생이었던 강시인은, 1985년 제주시 중앙로 ‘까메라따’에서 시화전을 같이 열기도 하였으며, 혼자 쓰던 서정적이고 아름답고 따뜻한 서정시가 장차 베스트셀러가 될 것임을 예감하고 내가 등단을 권유하여 1990년에 성춘복 시인이 주간으로 있던 ‘시대문학’으로 등단하여 한창 시 작업에 열중하고 있었다,

하루는 ‘나, 드디어 절필한다!’ 하는 것이었다, ‘뭐라고 절필한다고, 그래 시를 안 쓰고도 살 수 있을까?’ ‘한 번 살아봐야지’, 그 한 마디로 곧장 절필이었다, 그래도 설득해 보려고 고급 만년필을 선물하며 아윤선생이랑 몇 번 만났지만, 현재까지 시 한 편도 안 쓰고 태흥리에서 농부로 살고 있다, 정말 지독하다, 어쩌면 나는 존재하기 위해서, 숨을 쉬기 위하여 시를 쓰는 것이지만, 시를 쓰지 않고도 행복하게 잘 살아갈 수 있다면 절필이 뭔 대단한 일이겠는가.

어쩌면 ‘시사랑’ 커피숍은 집으로 귀가하기 전에 내 마음을 가다듬고 정리하고 조이던 숨통을 터야했던, 말 그대로 나만의 안식처였던 것이다, 나야말로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고 조용히 있고 싶었는데, 사람들이나 친구들은 뭣도 모르고 함부로 끼어들었던 것이다.

이십대를 나는 항상 시(詩)를 쓰고 커피를 마시고 바다를 바라보며, 흰 파도처럼 하얗게 웃으며 살았다. 소도시(小都市)의 해무(海霧)가 숨을 턱턱 막히게 할 때는 나도 그 짙은 해무 속으로 걸어가 영영 사라져 버리고 싶었다, 그래도 이 서귀포를 떠난 적이 없었는데, 그 자리에 숨죽여 가만히 있었는데, 나를 만나러 왔던 재능 많았던 사람들 몇몇은 하직인사도 없이 짧은 설명도 없이 느닷없이 떠나버렸다. 삼십년이 지나도록, 떠난 자(者)는 말이 없고 채 떠나지 못한 자(者)는, 말도 많고 속울음도 많고 그리움도 많다.

나는 붉은 바지와 꽃그림 블라우스를 입고 스스로 봉숭아 붉은 꽃 대궁이 되어서 온몸을 떨어 보았다, 마치 진통이 와 아기를 낳듯 부르르 떨 때마다 봉숭아 붉은 꽃은 다닥다닥 피어났다, 한참을 그러다 바다로 가서 짙은 커피를 마셨다, 흰 파도처럼 또 하얗게 웃다가, 우우 부서지다가, 깜짝 놀라 날아오르는 물까마귀를 한참 바라보다가, 날아보다가, 그리운 이름들을 소리쳐 불러보았다.

살아가다 긁힌 마음의 큰 상처 작은 상처를 깨끗하게 씻어내고 털어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마치 손톱에 봉숭아 물 들이듯, 세숫대야에 깨끗한 물을 받아, 이 세상에서 가장 밝고 고운 물감을 풀어 온몸에 가득 물들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 세상을 바람처럼 떠도는 미친(美親) 천사들, 그 질기고 때론 여리고, 선(善)한 목숨들을 위하여 시를 쓰고 싶다. 그리고 밤낮 볼 붉혀, 때 이른 등불 하나 켜는, 울담 밑에 봉숭아꽃 피는 마을에서 오래 오래 살고 싶다. [글 문상금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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