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필 폭염주의보가 발효된 한낮, 무릉 2리를 찾았다. 발길 닿는대로 제주의 구석 구석 찾아다니는 것은 숨은 유적 찾는 고고학자처럼 의미있는 일 같다.
무릉 2리는 서귀포시 대정읍 서쪽에 위치만 중산간 마을 중 하나로 2008년에 환경부에서 지정한 자연생태 우수마을이다. 정개밭, 구남물, 왕가동산, 포제동산, 서녁동, 앞동산, 검은 굴왓, 구시흘못 등 볼거리가 많은 동네다. 그리고 곶자왈, 자립형 마을, 범죄 없는 마을, 대문 없는 마을, 난장축제 마을, 술 익는 마을 등 수식어가 참 많다.
무릉2리 사무소 옆 왕가동산에는 곰솔나무, 상수리, 백서향, 개복숭아나무로 가득하고 4.3 위령비도 세워져 있어 마음이 엄중해진다. 사무소 지나고 무릉 주민들이 함께 운영하는 '무릉외갓집' 지나자 '구시흘못'이라는 팻말이 눈에 띈다. 얼른 핸들을 꺾어 표지판 따라 들어갔다.
비닐하우스, 태양열 밭 등 많은 농사를 하는 풍경이 눈 앞에 펼쳐졌다. 그 길을 지나 맨끝에 나무 한 그루 아래 소담스런 정자가 눈에 띄었다. 차를 세우고 곳곳에 설치된 나무데크를 따라 걸어 들어갔다.
'구시흘못' 표지판, '생태해설판'이 있어 자세히 읽어보았다. '물이 마르지 않아 항상 고여 있다.'는 뜻의 시흘못이라 한다. 이곳에는 황조롱이, 매, 아비, 장다리떼 새 등 조류 25종이 있다. 그리고 고랭이, 마름, 홀아비꽃대, 우산나물 등 109종이 있다니 너무나 놀랐다.
한 번 휘 둘러보니 꽤나 넓다. 넓은 못 사이로 나무 다리가 장황하게 설치해 있어 가슴이 탁 트였다. 그러나 폭염에 못은 바짝 말라 있고 이름모를 풀들로 무성했다. 나무 다리 위를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삐죽삐죽 나온 푸른 달개비며 산딸기 나무가 반겨준다. 그리고 천선과 나무에 열매가 맺혀 있다. 물은 말랐어도 식물들은 잘도 견디고 있구나.
다리를 걷다가 나무 다리 아래 고인 물가가 있다. 가만히 내려보는데 뭔가 꿈틀거린다. 눈 씻고 자세히 보니 자라다. 내게 16년 된 자라 세 마리가 있는데 꼭 그 만큼의 크기다. 그렇다면 저 자라는 줄곧 이곳을 지키고 있었던 거다. 그 누군가가 방생했을지도 모를 저 생명, 이 못에 나무 다리를 만들 때 놓아두었던 아기 자라가 저렇게 자랐을지도 모를 일.
가만히 물길을 보고 있자니 작은 물고기 떼도 보인다. 순간 희망을 보았다. 이 폭염이 끝나 비가 쏟아지면 이 연못엔 물이 차오를 것이고 다시 새와 물고기와 풀과 나무들이 활기를 띨 것이라고.
복사꽃 피는 꿈의 마을, 무릉도원 학당에선 제주어가 구수하게 들리고, 쉰다리로 만든 쉰다리 블루베리 스무디를 맛볼 수 있고, 개복숭아청을 맛볼 수도 있다. 원시림이 우거진 곶자왈을 걸으며 세상만사 다 잊을 수 있다.
얼마나 태양빛이 강렬했으면 느닷없이 스마트폰 카메라 작동도 되지 않는다. 비가 내린 후, 다시 한 번 꼭 찾아보고 싶은 구시흘못. 다음에 갈 땐 못의 지킴이 자라에게 줄 자라밥도 챙겨 가야겠다. 자라는 잡식성이라 그 무엇이든 잘 먹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