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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청비](17) 까만 오디가 날 부를 때가 되면
[자청비](17) 까만 오디가 날 부를 때가 되면
  • 이을순
  • news@newslinejeju.com
  • 승인 2021.06.24 15:47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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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을순 소설가
이을순 소설가
▲ 이을순 소설가 ⓒ뉴스라인제주

지난 5월 중순부터 까맣게 익은 오디를 따기 시작했다. 해마다 오디가 새까맣게 익어갈 때면 주변 지인들이 농장으로 모여든다. 오디 따기 체험에 동참하기 위해서다. 체험으로 딴 것들은 저렴하게 사갈 수 있기 때문이다. 남편과 내가 농장의 오디를 다 딸 수가 없으니 이렇게라도 오디를 소비시키게 된다. 그래서 오디 수확 철이 되면 남편과 나는 애월읍 봉성리에 있는 오디농장으로 날마다 출근하다시피 한다.

한데 한창 오디를 따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남편과 나는 2박 3일 일정으로 서울에 올라가게 되었다. 지인의 따님 결혼식이 있었고, 일 년 전, 서울에 새로운 보금자리를 마련한 딸네 아파트도 가볼 겸해서 오랜만에 외출하게 되었다. 그날도 오디 체험객들은 예약되어 있었기에 미리 자동차를 농장에 세워 두었다. 차 트렁크에는 일회용 비닐장갑과 여러 개의 소쿠리, 오디 케이스, 저울까지 있었다. 체험객들은 필요한 만큼 오디를 땄고, 그 무게만큼 저울에 달아서 인증샷을 찍어 카톡으로 보낸 후, 개인별로 은행 계좌로 입금해주었다. 무인 오디 따기 체험이었다. 그 때문에 땅에 떨어질 많은 오디를 다행히 소비시킬 수 있었다.

서울을 다녀온 후 내가 다시 오디농장으로 출근하려고 하자, 남편은 이제 오디는 그만 따라고 한다. 하지만 나뭇가지에 대롱대롱 매달린 까만 오디들이 자꾸만 내 눈에 어른거려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다. 물론 오디를 따는 일은 쉽지가 않았다. 그런데도 나는 오디 따기에 집착하였다. 아니, 오디를 따고 있으면 머릿속에 어떠한 잡념이 없어서 참 좋았다. 그게 비단 오디뿐이겠는가. 빨갛게 익은 고추를 딸 때도, 겨울 쪽파를 출하할 때도, 정신을 집중하여 일손을 움직였다. 남편이 짓는 농사가 그토록 싫다면서도 정작 그 농작물 수확 철이 되면 군소리하지 않고 그렇게 일에 매달렸다.

어느 날, 이런 날 보게 된 딸은 뜬금없는 말을 툭 던졌다. 엄마는 단순노동을 정말 잘한다! 뜻밖의 말에 나는 깜짝 놀랐다. 단순노동이라는 낯선 어감 때문인지도 몰랐다. 물론 수입하고도 연관이 있었으니 열심히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단순노동이라는 그 어감은 오랫동안 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내가 잊고 있었던 말을 딸이 정확히 되찾아주었다고나 할까. 그렇다, 내가 하던 일은 단순노동이었다. 그리고 그 일을 할 때면 열심히 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렇지만 그 노동이 끝나고 다시 내 자리로 돌아오게 되면 습관처럼 괴리감을 느끼곤 한다. 원고를 써야 하는데도 왠지 모르게 그 일이 낯설게만 느껴졌다. 그토록 친숙한 책의 활자조차도 제대로 눈에 들어오지 않아 때로는 날 당혹스럽게 만들기도 하였다. 그것들과 친숙해지려면 얼마간 조율의 시간이 필요했다. 그런 반복적인 일상을 겪어보니 지금은 나의 내면과 대면할 수 있는 시간을 차분하게 기다릴 줄도 알게 되었다. 간절한 마음의 기도를 통해서다. 손에서 놓고 싶지 않다는 글쓰기에 대한 나의 사랑일는지도 모른다.

지금도 내 머릿속에선 ‘도선사’가 맴돌고 있다. 잠시 서울에 머물고 있을 때, 친동생이나 다름없는 그녀는 날 우이동에 있는 도선사로 데려갔다. 간혹 내가 서울에 올라가게 되면 그녀는 으레 자신의 하루 시간을 온전히 날 위해 내어주곤 한다. 이런 그녀 덕분에 전등사, 길상사, 봉은사 등 여러 절집을 두루 돌아볼 수도 있었다. 이번에는 북한산이 훤히 보이는 도선사로 날 안내한 것이다.

그날 오후에는 부슬부슬 비가 내렸다. 절집 곳곳에는 기도하는 사람들도 붐볐고, 그녀와 나는 대웅전에서 삼배를 올린 후, 한가지 소원을 들어준다는 석불전 미륵불의 영험한 영영 앞에서 가족들의 사랑과 건강을 위한 기도를 올렸다. 그 아래쪽에 있는 십일면관세음보살이 있는 반야굴에서, 그리고 도선사 윤장대(輪藏臺) 손잡이를 잡고 세 바퀴의 원을 돌면서 하염없이 업장소멸 발원하자 나도 모르게 눈에 눈물이 고였다. 매사 부족함이 많은 내겐 배움으로 채워야 할 게 너무 많았다. 지혜의 목마름에 갈증을 많이 느꼈기에 깨달음의 혜안도 필요했다. 하지만 나를 위한 기도를 올리면 올릴수록 관세음보살은 오히려 그것들을 마음에서 말끔히 비워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 같았다.

뒤늦게 찾아간 농장 땅바닥에는 새까맣게 잘 익은 많은 오디가 바람에, 혹은 저절로 땅에 떨어져 자연으로 돌아가 그 나무에 거름이 되어 주고 있었다. 내년에도 어김없이 많은 오디가 나무에 주렁주렁 매달릴 것이다. 다시 까만 오디가 날 부를 때가 되면, 내 인생의 열매 또한 그처럼 잘 영글기를 소망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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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6-24 18:20:56
저도 잡념없이 오디를 따러 가고 싶네요. 마음 따뜻해지는 글 잘읽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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