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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청비](21) 어느 장사꾼의 이야기
[자청비](21) 어느 장사꾼의 이야기
  • 이을순
  • news@newslinejeju.com
  • 승인 2021.05.27 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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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을순 소설가
이을순 소설가
▲ 이을순 소설가 ⓒ뉴스라인제주

무더위가 기승을 부릴 때가 되면 사람들은 시원한 소재의 옷감을 찾게 된다. 그게 바로 제주의 전통적인 갈옷이라고 할 수 있다. 갈옷은 습기에 강해 땀을 흘려도 옷감이 몸에 달라붙지 않아 남녀노소가 즐겨 입을 수 있는 노동복이고, 평상복이고, 외출복이기도 하다. 그래서 갈옷은 오래전부터 제주의 관광 상품이 되었고, 제주를 대표하는 문화유산이 되었다. 세월의 흐름에 따라 제품의 디자인과 모양도 아주 독특하고 다양해져 소비자들 또한 즐겨 찾게 된다. 풋감의 즙만 내려받아 무명천에 물들이는 과정이야말로 오랜 숙련자가 아니면 그토록 미묘한 아름다운 색감을 만들어 낼 수가 없다. 그 정성스러운 손끝에서 만들어진 제품을 나는 좋아하는 편이다. 하지만 몇 년 전, 황당한 일을 겪은 후부터 그것을 보면 그때 일이 떠올라 일부러 눈길조차 주지 않게 되었다.

그러니까 당시 영국에 살고 있던 사위와 딸이 방학을 이용해 잠시 제주로 온다는 연락을 받고 나는 모처럼 침구류를 바꿔보려고 마음을 먹었다. 날씨도 점점 무더워서 아무래도 시원한 감물을 들인 제품으로 바꾸는 게 좋을 성싶었다. 다음날 쇼핑도 하고 운동도 할 겸해서 일부러 예전에 갔던 가게로 찾아갔다. 운동복 차림에 화장하지 않은 얼굴로 말이다. 주인 여자에게 내가 찾는 물건을 설명하자, 주인은 대뜸 그런 제품은 없다고 쌀쌀맞게 말했다. 그래도 이왕지사 맘먹고 왔으니 다른 물건이라도 찾아보려고 할 때, 유난히 눈에 띄는 게 있었다. 주인한테 그것을 좀 보여 달라고 부탁하자, 주인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그 가격이 얼마냐고 물어보았다. 그러자 주인은 자기는 말하는 걸 싫어하는 성격이니 더는 말을 시키지 말라는 뜻밖의 대답이 돌아왔다. 순간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말인즉슨 내게 장사를 하지 않겠다는 뜻이 아니던가. 정말이지 기가 찰 노릇이었다. 나는 수목원을 향해 걸어가다가 도무지 더는 운동할 수 없을 정도로 심기가 불편했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부아가 치민 것이었다. 이유도 없이 상대에게 무시당했다는 억울함이 좀처럼 뇌리에서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말끔하게 옷을 차려입고 갔을 때와는 영 딴판으로 대하는 불손한 태도가 너무나 괘씸했다. 나는 다시 가게로 들어갔다. 그러곤 조금 전에 느꼈던 나의 불쾌한 감정을 솔직히 말했다. 당신은 손님의 옷차림새를 보고 장사하냐고, 지난번에 물건을 샀을 때는 그러지 않더니, 이번에는 왜 불손한 태도로 손님을 대하느냐고 주인에게 따져 물었다. 그랬더니 주인은 꼬리를 바짝 내리며 날 달래기 시작했다. 무더운 날, 손님들이 들어와서 이것저것 물건을 만지고, 가격만 물어보고 그냥 돌아가서 그랬다며, 주인인 자기 입장도 좀 이해해 달라고 날 설득했다. 황당무계한 그 말에 그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그런 일을 겪은 후부터 감물을 들인 제품을 볼 때면 반사적으로 그때 주인 여자의 행동이 떠올라 그 물건조차도 외면했다. 한데 오늘 불현듯 조선 세종 때 황희 정승에 버금가는 명재상이었던 맹사성의 미담이 떠오른 것이다.

하루는 맹사성이 고향에 다녀오는 길에 갑자기 비를 만났다. 맹사성은 비를 피해 근처 주막에 갔으나, 그곳엔 과거를 보러 가던 중인 젊은 선비와 그의 일꾼들이 온통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맹사성은 젊은 선비가 자리를 양보하기를 바랐지만, 선비가 그러지 않자 맹사성은 은근히 화가 났다. 그 낌새를 눈치챈 선비는 맹사성의 허름한 옷차림을 보고 시골에 사는 아무것도 모르는 노인인 줄 알고 예의 없이 말하고 함부로 대했다. 나중에 과거에 급제한 선비는 관리가 되어 정승인, 맹사성에게 인사를 올리게 되었을 때 맹사성을 알아보고 자신에게 큰 화가 닥칠 것이라 걱정했다. 하지만 맹사성은 그런 선비를 탓하지 않고, 오히려 많은 도움을 주었고 선비 또한 맹사성을 본받아 훌륭한 관리가 되었다.

맹사성이 넓은 마음으로 선비를 포옹하는 미담을 어린이들에게 들려주면서 나 또한 깨달은 바가 있었다. 당시 내 마음도 옹졸하긴 했지만, 가게주인 여자 또한 그처럼 손님의 겉모습만 보고 함부로 대해서도 안 될 일인 것이다. 이제라도 그때의 묵은 감정을 비워냈으니, 올여름에는 제주의 풋감 향기가 물씬 묻어나는 멋스러운 제품 하나를 사볼 요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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