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2024-04-19 23:06 (금)
[문상금의 시방목지](20) 하논 배추꽃
[문상금의 시방목지](20) 하논 배추꽃
  • 문상금
  • news@newslinejeju.com
  • 승인 2021.05.17 1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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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논 가는 길, 햇빛 한 줌 머물다 가는 길 , 흰 새 한 마리 머물다 가는 길, 재잘대는 꽃들 사시사철 머물다 가는 길, 이 지상(地上)에서, 가장 아늑하고 고운 곳으로 가는 길’

하논 배추꽃

문 상 금

더 이상
물러설 곳이 내겐 없다

배추꽃 필 때
한바탕 양념으로 버무리는
매운 세상살이

노란 배추꽃을
먹는다

수 만 년 전 터져 나온
물과 불의 힘을 받아
튼실하게 뿌리내린,

봄이
온 몸을 관통(貫通)한다

단단히
버텨야겠다
 

-제5시집 「첫사랑」에 수록
 

문상금 시인
▲ 문상금 시인 ⓒ뉴스라인제주

밤하늘에 반짝거리는 무수히 많은 별들처럼, 흔하디흔한 노란 배추꽃은 길 닿는 어디에나 있다. 한 해 걸러, 풍작이라도 되는 날에는 밤새 갈아엎은 배추밭이 농부의 거친 손마디만큼이나, 지울 수 없는 그리움만큼이나 목에 걸린다. 얼떨결에 갈아엎지도 못한 변방에서 피어난 배추꽃은 슬프도록, 오래, 캑캑거린다.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너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란 김춘수 시인의 ‘꽃’이라는 시처럼, 소중하고 애정이 깃든 이름을 기꺼이 붙여주었을 때, 평범하고 보잘 것 없었던 그것들은 느닷없이 보석처럼 반짝거리더니만 찬란한 빛을 발하기 시작한다. 존재이유에 대해 더 특별해지는 것이다.

나는 시적 소재 대상으로 애착이 가는 동식물에 내 이름 붙이기를 좋아한다. 서귀포에 사방팔방 발길 닿는 곳마다, 이름을 붙이고 가끔씩 가보고 조용히 이름을 불러주곤 한다. 나의 시들은 전부 일상적인 생활과 진솔한 사랑과 존재의 성찰을 담고 있기 때문에, 대부분 직접적인 체험이며 시적 대상이 있고 흥미진진한 스토리가 항상 따라붙는다.

‘십자가’와 ‘장미’란 시를 쓴, 서귀포 동홍동 소재 주공5단지 아파트를, 한 바퀴 빙 둘러싼 흰 울타리에 다닥다닥 피어난 장미꽃들은, 매년 오월이면 아침저녁으로 늘 가서 사색의 시간을 보내는 곳이다. 시인에게 사색의 시간은 아주 중요하다. 수많은 영감이 떠오르고 초안을 잡는 시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서귀포에는 ‘작가의 산책길’이 있지만, 독일의 하이델베르그에는 ‘철학자의 길’이 있다. 네카(Neckar, 길이 367km) 강 건너편에 있는 작은 언덕에는 옛날 이 도시에 살던 철학자들이 즐겨 산책하던 길이 있는데, 이 길을 가리켜 ‘철학자의 길’이라 부른다. 옛날 철학자 칸트는 매일 정해진 시각에 이 강변에 있는 다리를 산책하였는데, 그가 이 다리를 지나는 시각은 어김없이 정오였다고 한다. 칸트를 비롯하여 헤겔, 야스퍼스 등 석학들이 이 길을 걸으며 사색에 잠겼다고 하며,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쓴 괴테도 이 길을 걸었다고 한다. 언젠가 서귀포에도 ‘시인의 길’이 생겨날지도 모른다.

벌써 이십년 째, 그 곳에는 특별한 ‘문상금 장미나무’가 한 그루 있다. 비슷해 보여도, 사람의 얼굴이 다르듯, 반려견의 얼굴이 다르듯, 하다못해 예전에 키우다 너무 가난해서 팔아버린 소를 동네 어귀에서 만났을 때, 옛날 주인은 그 소의 얼굴을 알아보고는 끌어안고 엉엉 울었다는 얘기도 있지 않은가. 장미나무들 틈에서 유독 한 그루가 눈에 들어왔던 것이다. 그 잎이며 줄기 그리고 꽃이 아주 선명하게 눈에 들었던 것이다. 매년마다 가서 사진을 찍고 인화하여 몇 장은 코팅을 해서 가끔씩 외로울 때마다 꺼내보곤 한다. 장미꽃을 바라보고 또 바라보는 그 순간마다, 조용하고 적막했던 마음에 따뜻한 피가 돌기 시작하고, 피고 지는 장미꽃 붉은 열정 따라 심장도 다시 쾅쾅 뛰기 시작하는 것이다.

‘문상금 흑장미’는 서귀포시내에서 조금 멀리 떨어진 곳에 있다. 흑장미를 선뜻 심어준 친구가 있다. 유독 장미(薔薇)를 좋아하고 자주 얘기하고, ‘장미꽃이 한가득 피었으면 참 좋겠네.’ 지인들과 차를 마시며 노래했더니, 이튿날 이른 새벽에 전화가 왔다. 혹 장미나무를 심게 되면 어떤 종류가 좋을지를 묻는 것이었다. 보통 가게 끝나고 새벽4시 무렵, 운천사 (우리 집 북쪽언덕에 있는 사찰)절간에서 울리는 종소리 들으며, 매일 글 쓰다 잠들기 때문에, 이른 새벽은 나에겐 한밤중이다, 잠결에 ‘장미하면 흔한 붉은 줄장미도 좋지만, 토종 흑장미라면 더 귀하고 금상첨화지요’ 대답했다. ‘어디서 구하면 좋겠느냐?’ 만우절처럼 장난하는 줄 알고, ‘가끔 서귀포 오일장 갈 때, 입구에 있는 꽃집에 가서 꽃들과 어린 묘목들을 한참 구경할 때가 있는데, 그 때, 흑장미 묘목을 보았다고, 그곳으로 문의하면 아마 있지 않을까?’ 그랬다, 그리곤 다시 잠들었고, 잊어버렸다,

일주일후 쯤 장미나무를 다 심었다는 연락이 왔다, 자그마치 218 그루의 흑장미를. 한 그루에 일만 오천 원 하는 성목(成木) 장미나무를 깎아 달라고 해서, 일만 삼천 원에, 묘목상이 갖고 있는 것을 몽땅 사서 심었다는 것이다. ‘이런 미칠, 그럼 대체 돈이 얼마야, 서너 그루면 족할 것을, 미니멀 라이프(삶에 필요한 최소한의 물건만 갖추고 사는 생활)도 몰라, 그 돈에다 조금 더 보태면 시집 한 권(보통 1,000부 기준)을 반듯하게 낼 수 있을 텐데’ 속으로 좀 놀랐지만, 이왕 심어버린 것을 어쩌랴, 나중에 흑장미를 보러 수많은 사람들이 오고가면 그것도 참 좋은 일이겠지, 조금도 놀라지 않은 척, 그럼 218 그루 전부를 ‘문상금 흑장미’라고 명명한다고, 선언해버렸다. 나는 알았다, ‘간절히 그리면 꿈은 이루어지듯이, 늘 노래하면 소망은 이루어진다.’ 는 것을.

‘때로 꽃에 미칠 때도 있는 거겠지요, 때론 꽃으로 한 턱 낼 때도 있는 거겠지요’ ‘그래, 고맙다, 참 고맙다’ 그럼으로써 나는 본의 아니게 아주 넓고 넓은 흑장미 정원을 갖게 된 것이다. 여기서 갖게 되었다는 것은 시간 될 때에, 언제나 가서 바라볼 수 있고 그 향기에 취해 볼 수 있고, 오랜 시간 사색하며 머물 수 있다는 뜻이다. 맛있는 점심도 먹고 꽃도 보러 오라고 몇 번 기별이 왔지만 그러나 여유 시간도 별로 없고 시내 밖으로는 운전도 하지 않고 길도 서툴러서 가지를 않았다. 다만 마음으로 그 흑장미를 하나씩 불러내어 잎이 돋고 쭉쭉 뻗어나가는 줄기와 그 꽃봉오리들과 얘기를 나눌 뿐이다.

화창한 봄날에 지인들과 한 번 갔었다. 크고 작은 바위 곁에서, 빨간 새순 같은 가지를 키워 올리며 고혹적인 자태로 피어나는 그 흑장미들을 비로소 보았다. 야생의, 날것의 날카로움을 본능적으로 갖고 있으면서, 따뜻하면서도 치명적인 매력을 뿜어내고 있는 그 모습을 관찰하면서, ‘흑장미’란 시를 썼다. 그 검붉은 꽃봉오리의 당당함과 강인함, 그리고 주변의 어두운 기운들을 한 곳으로 끌어 모았다가 다시 밝고 환한 기운으로 바깥세계로 내보내는 바로 적멸보궁(寂滅寶宮,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곳)을 보았다. 그 흑장미들을, 그 수많은 적멸보궁들을 바라보면서 내가 받은 상처들, 내가 준 상처들, 내가 뱉었던 온갖 거친 말들, 온통 섭섭했던 마음들과 그리고 조개 화석처럼 켜켜이 쌓여있었던 분노의 찌꺼기들이, 그 흑장미 향(香)따라 조금씩 흩어져 사라졌다.

그리고 친구에게는 꽃을 좋아하고 정성스레 심고, 정원을 잘 가꾼다는 의미의 ‘정원사’, 일처리도 날랜 말처럼 잘한다는 의미로 ‘적토마‘ , 그리고 외로웠지만(정에 굶주렸지만), 잘 견디었다는 의미로 ’께르륵 동녕바치‘ 란 시를 써서, 고마운 마음을, 시로 보답해 주었다.

이처럼 애착하는 시적 소재 대상에 일일이 이름을 붙이고 오랜 세월동안 동고동락하면서 시 작업을 하는 것은 바로 아바타(분신, 시적 대상)를 통하여 내면의 깊은 방에 잠들어있는 수많은 자아들과, 그 자아들을 불러 깨워, 그들에게 하나씩 날개를 달아주고, ‘너는 아주 특별한 존재야’ 하고 말해 줌으로써, 그 시적대상의 가치를 높여주고 더 진솔한 자신의 본모습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바탕작업이 되는 것이다.

하논은 분화구이다, 매우 큰 화구(火口)를 갖고 있다, 뜻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 중에 ‘많다’란 의미의 ‘하다’와 ‘논’이 합쳐져 ‘논이 많다’란 의미를 포함하며 현재는 많이 줄었지만 분화구 내에 일부 논농사가 이루어진다. 봄에는 초등학생들에게 벼 몇 포기씩 분양해주고 관찰하며 키워보는 체험학습도 이루어지곤 한다.

시인은 사시사철 하논의 평화스런 풍경과 구부러진 길 따라 피고 지는 유채꽃과 갯나물꽃, 냉이꽃, 찔레꽃, 동백꽃, 여러 종류의 야생화들 그리고 그 기특한 목숨들이 뿌리내린 붉은 흙을 아주 사랑하여 자주 산책을 나갔다.

배추꽃은 그냥 평범하지만 ‘하논 배추꽃’은 아주 특별하다. 그것은 2019년 3월 19일 화창한 봄날에, 하논 산책길에 나선 시인이 평화로운 들판에 외로이 혹은 무리지어 있는 배추들과 우연히 조우(遭遇)하였을 때, 그 크고 푸른 잎과 튼실한 뿌리, 그 솟아오르는 동지나물에 움트고 있는 꽃망울까지 너무나 신비롭고 소중하고 아름다워, 곧장 사진을 찍고 ‘하논 배추꽃’이란 이름을 짓고 큰 소리로 불러주었기 때문이다. 계란 노른자를 먹을 때처럼 목 메이는 그런 애틋함으로 기꺼이 다가갔을 때, 배추꽃은 그 부르는 소리에 깜짝 놀라, 노란 꽃망울을 마치 후리지아 꽃처럼 활짝 터뜨렸기 때문이다.

공감이 되어야 한다, 감동이 있어야 한다, 한 줄의 시를 쓰든, 한 권의 시집을 내든, 수필집을 내든, 서로 어우러지고 위안을 주고, 밝은 에너지를 받고 또다시 꺼내어 읽어보고 싶다는 그런 마음이 들 수 있도록, 치명적인 매력이 철철 넘치는 그런 창작 작업을 할 수 있어야 한다.

늦봄이 온 몸을 관통(貫通)한다.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다, 이 세상의, 사각 링 안의, 이 악문, 인파이팅처럼, 레프트, 라이트! 훅, 훅, 레프트, 라이트!

밤안개가 자욱하게 내리는 세상의 끝, 채 잠들지 못한 시인은 자꾸만 졸리는 눈, 벌겋게 충혈 되어버린 눈을 치켜뜨며 시를 쓴다. 또다시 깊은 상처로 남는다 할지라도 아직은 뚜벅뚜벅 걸어가야 할 길이 있다.

툭! 툭!! 툭!!!

생(生)의 문을 두드리는 것, 시(詩)에게, 처절한 생명을 불어넣어 주는 것, 나는 쨉(jab)을 날린다, 아주 강력한 한 방을 날린다. 땡 ~ 하고, 공이 울릴 때까지, 지쳐서 쓰러질 때까지. [글 문상금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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