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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상금의 시방목지](19) 찔레꽃
[문상금의 시방목지](19) 찔레꽃
  • 문상금
  • jeju@newslinejeju.com
  • 승인 2021.05.10 11:3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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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찔레꽃을 보면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어머니들의, 선한 사람들의, 어떤 가슴앓이 같은 것들이 꽃잎으로 한 잎 한 잎 피어나는 것 같다. 분홍 찔레꽃을 보면 가슴이 설렌다, 연분홍 살짝 깔린 편지지에 깨알같이 써내려가던 연애의 설렘이 요동친다. 붉은 찔레꽃을 보면 여전사가 되고 싶어진다, 붉은 망토를 휘두르며 매일 칼을 가는, 전사가 뮬란이고, 화랑이고, 바로 시인이다, 찔레꽃들의 붉은 가시는, 날 선 칼날은, 시가 되어, 매일 시인의 심장을 겨눈다.’

찔레꽃

문 상 금

밤을 새워
서러움과 슬픔이라고
노래 부르는 장사익처럼

나는 노래 부른다
한라산 중산간(中山間) 비탈길을
하얗게 뒤덮어오는
찔레꽃은

차마 놓지 못하는
한 인연(因緣)이라고

날 선 풀잎 같은,
칼날 같은
인연이라고
 

- 제3시집 <누군가의 따뜻한 손이 있기 때문이다>에 수록
 

문상금 시인
▲ 문상금 시인 ⓒ뉴스라인제주

나에게 있어 시를 쓴다는 것은, 글을 쓰는 작업은, 그저 일상이다. 매일 세수하고 밥 먹듯, 매일 일상의 기록을 남기는 것이다. 주어진 삶을 온전히 살다가기엔 어렸을 때부터 너무나 예민한 영혼을 가졌기에, 낯설고 두렵기만 한 이 세상을, 글자를 익힌 후(일곱 살)부터는 온통 글로 표현하기 시작하였다. 모든 것을 기록하기 시작하였다. 그것들은 낙서가 되거나 일기가 되거나 혹은 시 비슷한 것들이 되거나 때론 수천 편의 시가 되어, 흰 나비처럼 팔랑팔랑 날아다녔다.

2010년 12월 26일, 오후 4시, 깊고 깊은 겨울에, 정말 거짓말처럼 흰 눈이 펑펑 쏟아지던 날, 장사익 소리판 ‘역(驛)’ 공연이 제주아트센터에서 있었다. ‘제주 첫 입성’ ‘가슴을 파고드는 고요한 반란이 물을 건너서 섬에 닿다’ 이처럼 포스터를 가득 채운 문구가 참 인상적이어서 오래도록 바라다보았다. ‘찔레꽃’과 ‘꽃구경’ ‘역’ 그리고 ‘동백아가씨’ 노래가 공연순서에 들어있었다. 제주 어디에서나 볼 수 있었던 봄꽃인, 한 많은 꽃, 찔레꽃과 겨울을 지나 봄까지 피고 지는 열정으로 볼 붉힌 꽃, 동백꽃을 한없이 사랑하였기 때문에, 그 꽃들이 들어간 노래를 장사익 선생은 어떻게 부르는지, 그 표정은 어떤 모습인지, 그 목소리는 어떤 울림인지, 궁금하여, 일십 만원이 넘는 입장권을 VIP석으로 미리 구매하였다. 그리고 ‘찔레꽃’과 ‘동백아가씨’는 평소에 내가 즐겨 부르는 18번곡이기도 하였다.

나는 이런 것을 소풍이라 부른다. 나에게 소풍은 다름 아닌, 크고 작은 이끌림을 말한다. 때로 그것들은 강렬한 이끌림으로 나를 외부로 끌어낸다. 나는 스스로 서귀포 붙박이다. 내 몸을, 내가 살고 있는 지역이나 작은 공간 안에서 스스로 갇히고 통제하는 대신, 내 영혼은 자유자재로가 되어 날아다닌다.

2019년 3월 30일 토요일은 너무나 아름다웠다. 하늘은 맑고 잔잔한 바람 불던 아침에, 김밥과 과일 서너 개를 싸들고 벚꽃 소풍을 떠났었다. 차창 밖, 세상은 낯설면서도 신비로웠으며 너무나 특별했다. 벚꽃 만개하던 그 날, 분분히 벚꽃에 홀려, 제주시내로 소풍을 가보곤 벌써 삼년 째, 서귀포 원도심을 벗어나 본 적이 없다. 더 이상 소풍이 없었다는 것은 선명한 이끌림이 없었다는 뜻이다. 더 이상의 소풍은 있을지 없을지, 아직 잘 모르겠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천상병 시인이‘ 귀천(歸天)’이란 시에서 노래한 것처럼, 그 크고 작은 소풍들은 참으로 특별했고 아름다웠고, 그 때마다 ‘찔레꽃’이나 ‘벚꽃’ 같은 시(詩)가 태어나 세상으로 나갔다.

장사익 선생의 ‘찔레꽃’과 ‘동백아가씨’를 들으러 가는 그날따라 꽁꽁 얼어붙은 5.16도로(제1횡단도로)를 버스는 엉금엉금 기었다. 그칠 줄 모르고 펑펑 쏟아지는 눈과 나무가 만나면 금방 눈꽃이 화사하게 피어났다. 그 흰 겨울나무들과 끝없이 펼쳐지는 설경들을 구경하면서 한라산을 건너 산천단을 지나 아라, 광양을 지나 터미널에 내렸다. 언제부터인가(1985년, 제주대학교 국문학과 재학 시절부터), 터미널에서는 꼭 멸치국수를 한 그릇 먹곤 하였다. 국물까지 한 방울도 안 남기고 먹으니, 배가 든든해졌다. 다시 버스를 타고 ‘제주아트센터’에 도착할 때는 늦은 오후였다. 벌써 좌석들은 꽉 차 있었다.

장사익 선생은 시종일관 흰 두루마기 차림이었다. 순박하고 서러운 찔레꽃이라고 노래할 때마다, 소리 지를 때마다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 소름이 오돌오돌 돋을 때마다, 내 영혼에도 흰 찔레꽃들이 움찔움찔 피어나곤 했다. 그렇지 않아도 늘 봄이 오면 한라산 중산간(中山間) 비탈길을 하얗게 뒤덮어 오는 찔레꽃을 보러 사방팔방 돌아다니곤 했다. 흰 찔레꽃을 바라볼 때마다 차마 놓지 못하는 한 인연(因緣)이라고, 풀잎 같은 인연이라고 참 서럽고 안타까운 마음이었는데, 노래를 듣는 내내, 어찌나 서럽고 징그럽던지, 나중에는 정말로 징징하였다.

나는 순간 알았다, 장사익 선생은 눈으로 노래를 부른다는 것을, 그 고요하고 깊은 눈으로, 아름다운 이 세상을 오롯이 담아, 정말로 진한 눈물 철철 흘리며 소리를 지르고 질렀다는 것을, 내 눈에서도 쉴 새 없이 눈물이 흘러나왔다. 뚝 뚝 눈물이 흘러 떨어질 때마다, 어디선가 붉은 동굴 속, 잠들어 있었던 내 분신들이 번데기를 뚫고 나와, 비로소 눈부신 흰 나비로 모습을 드러내어 팔랑팔랑 날아다녔다. ‘훨훨 날아봐, 훨훨 날아봐!’

장사익 선생한테도 흰 찔레꽃은 바로 그저 평범한 꽃이 아닌 아주 한 맺힌 그런 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 노랫소리도 그냥 노래가 아닌 거칠고 거친 이 세상을 향해 도전장을 던지는 처절한 비명 소리가 아니었을까. 마흔 여섯 살에 늦은 소리꾼의 길을 가겠다고 모든 것을 떨치고 산으로 들어가 소리만 질렀다는, 목에서 피고 나고 또 피가 나서, 비로소 붉은 피도 멈추어 버렸다는, 그 전설 같은 이야기를, 소리꾼으로 성공할 수 있어서,이처럼 눈 펑펑 쏟아지는 한겨울 제주 섬에서, 흰 찔레꽃처럼 하얗게 웃으며 노래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이 좋아서 사람이 그리워서 노래한다는 소리꾼, 그 굴곡진 삶 속에서도 음악의 끈을 놓지 않았던 소리꾼, 한 맺힌 혼이 있는 목소리, 자글자글 얼굴 주름을 훈장처럼 달고, 눈으로 울부짖는 그 몸짓들은, 내가 어린 시절부터 제주 중산간 들판을 돌아다니며 보고 또 보았던 바로 그 찔레꽃이었다. 음반을 한 장 구입하고 다시 엉금엉금 기어서 집으로 와서 밤새 찔레꽃 노래를 들으며 ‘찔레꽃’ 시를 썼다.

하얀 꽃 찔레꽃. 순박한 꽃 찔레꽃. 별처럼 슬픈 찔레꽃. 달처럼 서러운 찔레꽃. 찔레꽃 향기는 너무 슬퍼요. 그래서 울었지. 밤 새워 울었지. 찔레꽃 향기는 너무 슬퍼요. 그래서 울었지. 목 놓아 울었지.

(‘찔레꽃’ 가사 중략, 장사익 / 작사, 작곡, 노래)

새벽이 올 무렵에는 나도 별처럼 슬픈 찔레꽃 따라, 그 슬픈 찔레꽃 향기 따라, 목 놓아 울고 있었다. 울다가 얼핏 잠이 들었다. 잠과 잠 사이로 숱한 꽃들이 날아다녔다, 여태 꽃을 꺾어본 적이 없는데, 꺾어 입에 물어 본 적은 더더욱 없는데, 잠결에 뱉을 수도 없는 입 안 가득 고이는 피, 나는 순간 알았다. 입 속에 온통 찔레꽃이 피어나고 있다는 것을, 찔레꽃이 피어날 때마다 가시가 찌르고 있음을, 그리고 꽃을 피운다는 것은 그냥 자연(自然)의 순리(順理)를 따라 피어날 수도 있겠지만, 꽃봉오리를 힘껏 만들어 밀어 올리지 않으면 너무나 못 배겨서, 도저히 견딜 수 없을 때, 심장을 타고 목을 지나 입에 도착한, 그 핏덩어리들을 뱉어내려고 꽃을 피운다는 것을.

결국 그리움 같은 것, 한숨 같은 것, 왈칵 왈칵 뱉어낸다는 것을.

찔레꽃이다, 온통 찔레꽃이다. [글 문상금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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