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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청비](17) 오늘도 나는
[자청비](17) 오늘도 나는
  • 이을순
  • jeju@newslinejeju.com
  • 승인 2021.04.29 09:5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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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을순 소설가
이을순 소설가
▲ 이을순 소설가 @뉴스라인제주

며칠 전, 작은언니한테서 전화가 왔다. 내일 대파 작업해서 육지거래처로 보내야 하는데, 당장 일손 구하기 힘들다고 했다. 계속되는 코로나19 때문에 외국인 노동자들이 제주에 들어오지 않아서 그렇다고 푸념했다. 딱히 해야 할 일이 없었던 나와 남편은 언니네 일을 도와주기로 약속했다. 다음날, 우리는 언니네 부부와 함께 대파밭에서 열심히 일했다. 점심시간을 제외한 나머지 시간은 그야말로 거래처 물량을 맞추기 위해 온정신을 집중하여 작업에만 몰두했다. 고된 일과를 끝내자 언니는 우리에게 수고했다며 일당을 건넸다. 그 돈을 받은 남편은 농사짓는 것보다 차라리 일당 받고 일하는 게 훨씬 낫다며 농담처럼 말했다.

집으로 돌아오자 등줄기가 뻣뻣해지면서 등과 허리가 아프기 시작했다. 특히 허리 통증은 이틀이나 계속되는 바람에 내가 해야 할 일도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남편의 농사일을 도와주는 것과는 사뭇 달랐다. 마음대로 쉴 수도 없었고, 꾀도 부릴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노동의 체험을 겪어본 후에야 비로소 크게 깨달았다. 그동안 내가 하는 일에 대한 고마움을 잠시 잊고 있었다는 것을. 사실, 지지난해 4월 ‘아름다운 이야기할머니’에 합격한 후, 그 해 다달이 제주와 서울을 오가며 전문강사로부터 현장교육을 받았다. 그리고 작년 신학기부터 본격적으로 유치원과 어린이집에서 이야기할머니로 활동하고 있다. 이야기할머니 사업단의 교육 프로그램에 따라 전래동화, 선현들의 미담, 옛날이야기를 매주 한편씩 외워 일주일에 두 번 아이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활동이다. 한데 이야기를 외우는 게 쉽지는 않았다. 물론 외운 이야기를 아이들에게 들려주고 나면 마음이 뿌듯해지면서 나름대로 보람도 느낄 수가 있었다. 하지만 다시 이야기를 외우려면 스트레스를 받곤 하였다. 그렇다고 그만둘 수도 없었다. 엄청난 경쟁률을 뚫고 합격했고, 교육까지 다 받았던 터라 그 공들인 시간이 너무나 아까웠다.

그럴 무렵, 언니네 대파 작업을 하게 된 것이었다. 그러면서 사람에겐 각자에게 맞는 일들이 있다는 것을 그제야 알게 되었다. 언니는 오랜 세월 그 일을 해왔기 때문에 돈을 벌면서 가족들과 자기만의 보람된 삶을 누리고 있었다. 그와 반대로 나는 책을 보고, 글을 쓰고, 아이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지금의 여유로운 노년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그게 언니와 내가 서로 다른 삶의 방식인 것이다.

대파 일을 다녀온 후 나는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질문과 더불어 ‘진정한 행복은 어디에서 오는가?’라는 질문을 스스로 던져보았다. 내면의 소리는 주저 없이 소설을 쓸 때라고 말했다. 아직은 창작의 곳간이 황무지처럼 메마르지 않은 게 참으로 다행이라고 덧붙이면서. 그게 유일하게 날 지탱해주는 삶의 힘이고, 그 안에서 살아가는 이유도 내포되어 있다고 내게 속삭인다. 그러나 슬프게도 나는 알고 있다. 이런 삶의 방식에서 벗어나야만 진정한 행복과 자유를 느낄 수 있다는 사실을. 왜냐하면, 매번 작품에 마침표를 찍을 땐 언제나처럼 마음에 공허감이 몰려왔으니까. 그 공허감에서 벗어나려고 다시 작품을 쓰게 되고, 나는 여전히 그 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어쩌면 지금도 ‘신이 내린 광기’를 꿈꾸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느 날 갑자기 예술의 광기가 내 안으로 스며들어 멋진 작품 하나를 쓸 수 있다는 꿈과 희망. 그 헛된 미련이 좀처럼 날 놓아주지 않고 있다. 물론 좀 더 세월이 흐르면 스스로 알을 깨고 밖으로 나올 것이다.

인내와 의지력과 정신력이 강한 언니의 삶은 내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주었다. 그 덕분에 이제 더는 이야기를 외우는 일에 스트레스를 받지 않게 되었다. 겸손하고 배려심 있는 나의 이야기할머니 활동이 자라나는 아이들에게는 꿈이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이야기를 외우면서 나 또한 부족한 인성을 배우고 있는지도 모른다. 가랑비에 서서히 옷 젖듯이 말이다. 오늘도 나는, 감사한 마음으로 아이들에게 들려줄 이야기를 외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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