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일마다 서귀포가 시작되는 마을, 시흥리로 떠난다. 제주의 푸른 하늘, 해안가의 풍속계, 색색이 슬레트 지붕들, 유채꽃, 벚꽃 속을 가르며 해를 넘겼다.
시흥리에 가까워지면 종달리 지미봉, 성산 일출봉, 시흥리 두산봉이 나를 반긴다. 특히나 비 오는 날 풍경은 운치가 그만이다.
비 오는 그 날도 마악 핸들을 꺾어 시흥초 후문에 위치한 주차장으로 들어가려던 순간이었다. 빗 속에 하얀 물체가 차창 유리에 어른거렸다. 선녀인가? 아니면 대낮의 도깨비인가?
가만히 차를 세우고 자세히 보니 세상에나, 새하얀 백로였다. 비를 맞으며 홀로 가만히 앉아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 같았다. 나는 얼른 셔터를 눌렀다. 비가 앞을 가리든 차창이 앞을 가리든 눈 앞의 신비한 광경을 잃을까봐 얼른 찰칵찰칵 눌러댔다. 흐릿하게 찍히든 그림자만 찍히든 떠나가버린 휑한 빈 자리가 찍히든 숨도 쉬지 않고 눌렀다. 새나 나비는 쉽게 날아가버리기에, 그러면 끝이기에.
그 순간순간에도 뇌리 속에는 의문으로 가득했다.
'왜 하필 비 오는 날 이 마을로 내려왔을까? 짝을 잃었나? 배가 몹시 고팠나? 사람에게 무슨 할 말이 있나?'
예전에 조천 북카페 '시인의 집'에 들렀을 때 바닷가에 노니는 백로를 만난 적이 있다. 이렇듯 백로는 물가, 습지, 해안가에 서식하는 조류다. 그런데 왜 하필 두산봉 아래 위치한 마을, 학교 정문에 찾아 왔을까. 가까이에 있는 성산 오조리 철새도래지에서 잠시 이탈했을까.
아마도 시흥리에 기쁜 소식을 알려주러 온 건 아닐까. 행운의 징조로 해석하고 싶다. 백로는 두루미(학)와 고니(백조)와는 달리 여름 철새로 봄에 우리나라에 찾아와 여름을 보내고 10월 말이면 큰 무리를 이루어 남쪽 나라로 간다. 겉이 희고 깨끗하여 청렴한 선비를 상징하고 시문이나 화조화에 많이 등장하는 새다. 시흥초등학교 후문에서 서성거리고 있던 것은 아이들에게도 희고 깨끗한 마음, 밝은 미래를 암시하는 날갯짓이 아니었을까.
차를 정지하고 숨도 쉬지 않고 그저 응시하고만 있었는데 잠시 후 하얀 천사의 날개를 활짝 펼치고 두산봉 쪽으로 날아갔다. 얼른 뒤쫓아 가보니 백로가 날아간 곳엔 깨꽃이 핀 깨밭, 그리고 무덤 하나 보인다.
꿈 꾼 듯 아늑하여 두산봉 허리에 눈을 박고는 멍하니 앉아 있었다. 비 오는 날 시흥리는 마치 누구나 백로가 되어 훨훨 날 수 있는 꿈의 마을처럼 느껴졌다. [양순진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