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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상금의 시방목지](15) 대나무 숲에서
[문상금의 시방목지](15) 대나무 숲에서
  • 문상금
  • jeju@newslinejeju.com
  • 승인 2021.04.12 1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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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나무는 지조(志操)다, 인내이다. 또한 흔들림이면서, 흔들림이 아니다. 대나무는 사랑이다, 지독한 사랑이다, 시퍼런 칼날이다, 함성이다. 죽순은 아린 맛이다, 잊을 수 없는 식감의 아픔이다. 찬란한 슬픔의 봄맛이다.’

대나무 숲에서

문 상 금

댓잎 소리 듣는
바람 부는 날

대나무는 안다
밤새 가슴 맞대고 비벼대면
사철 짙푸른 잎 돋아날 것을

대나무는 안다
하늘로 키를 키웠음은
바로 자신을 향한
시퍼런 칼날이었음을

온통
댓잎 소리,
소리들
 

- 제5시집 <첫사랑>에 수록
 

문상금 시인
▲ 문상금 시인 @뉴스라인제주

언제부턴가 바다 다음으로 즐겨 찾는 곳은 바로 대나무 숲이다. 집 근처 종종 산책길을 나설 때 들리는 곳이 세 군데가 있다. 며칠 전에는 토상(토평과 상효가 합해진 마을)에 있는 조가물(조선조 중종 14년 기묘사화를 피해 온 조씨가 만든 우물, 현재도 생활용수로 쓰고 있으며 마실 수 있을 정도로 깨끗함, 상효1동 노인회에서 돌보고 있음) 근처에 있는 그리 크지는 않은 대나무밭에서 그러나 밭주인(오홍제翁,85살)이 직접 캐어 주시는 아주 크고 탐스러운 죽순을 얻어 왔다. 품질이 우수하다고 소문이 났는지 몇 해 전 제주신라호텔 한식당에서 죽순을 관찰하러 나온 적도 있다고 하셨다.

서홍동 북쪽 냇가 따라 쭉 펼쳐진 대나무 숲은 울창하고 대나무도 굵어 아주 볼만하다. 특히 대숲 전체가 파도치듯 출렁이며 쏟아내는 댓잎 소리들은 가만 귀 기울이면 함성의 파도소리처럼 노래처럼 오래도록 여운을 남기곤 한다. 그 숲 어귀 냇가 따라 벚나무가 수령이 오래되었고 올봄에는 벚꽃이 아주 흐드러지게 피어 끝내는 벚꽃 눈으로 분분히 떨어져 쌓였다.

그 냇가는 건천인데, 비가 내릴 때에만 흘렀고 중간 큰 바위 사이에 작은 연못처럼 물들이 고여 웅덩이를 이루곤 했다. 오랜 세월동안 부유물이 쌓였는지 냇가 한가운데에는 작은 섬이 바위 곁에 생겨났고 그 곳에 용케도 대나무가 뿌리 내렸는지, 작은 숲이 또 형성되고 있었다. 신기하여 자세히 바라보는데, 오호라, 짙은 갈색의 거대한 포탄 같은 것이 세 개나 눈에 띄었다. 바로 죽순이었다. 곧장 바위벽을 타고 내려가 다시 물웅덩이 사이를 뛰어넘고 대나무가 있는 곳에 다다르니, 땀이 뻘뻘 났다.

죽순을 캘 때는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하는지 잘 모르지만 나는 발을 이용하곤 한다. 뒤꿈치로 죽순 아랫부분을 가격하면 아아, 불룩하고 묵직한 것이 순식간에 산처럼 넘어진다. 죽순을 들고 다시 바위 사이를 이리저리 돌아 나오는데 물웅덩이에 새까만 생명체들이 우글우글하였다. 갓 알에서 깬 올챙이 떼였다. 바위와 가시덤불에 긁혀 팔과 다리는 온통 상처투성이가 되었지만 죽순도 캐고 올챙이들도 보았으니, 얼마나 운이 좋은 날인가. 그 날 저녁은 고추장과 참기름으로 한 양푼 박박 비빈, 아주 맛있는 죽순 비빔밥이었다. 마치 미더덕을 씹는 것처럼 오도독거리는 식감까지도 봄의 향긋한 입맛을 불러오는 것이었다.

기당미술관 서쪽에 있는 대나무 숲은 사색하며 걸어보기에 딱 어울린다. 겨울은 겨울대로 푸르러서 좋고 여름은 여름대로 시원해서 참 좋다. 올봄에도 벌써 서너 번 갔다가 왔다. 짙푸른 대나무 숲은 바람 불 때마다 흔들거렸다. 그것은 꿈틀거림 같은 것이라고 세상 향한 아우성 같은 것이라고, 짙푸른 잎들은 깃발처럼 부르르 떨었다. 눈부시지만 한편으론 늘 외로운, 가슴속 가라앉는 슬픔 같은 것, 바람 부는 날에 더 시퍼런 자신을 향해 칼날 갈며 흔들리곤 하는 댓잎 소리, 소리들.

‘오늘도 대나무 숲을 거닐었어요.’ ‘시인을 만난 대나무들이 아주 좋아했겠네요?’ ‘네, 대나무들이 아주 좋아했어요.’ ‘뭐라고 하던가요?’ ‘대나무들은 바람 불 때 마다, 서로 흔들리며, 서로 기대며, 사랑한다고 하였어요.’ ‘하기야, 생각 차이! 나는 생각하길, 대나무의 꼿꼿한 기상이 절대 불의에 응하지 않을 것임을 알고, 또 한 편으론 그 댓잎 소리들이 음산해서 싫고 그리고 어릴 때 들었던 4.3의 이야기들, 잘린 상투머리가 매달렸던 큰 대나무며 죽창을 만들어 북문에 보초 섰던 제주아낙들의 슬픈 이야기 등등’ 아, 짜르르 아픔이구나. 누군가 숨 죽여 지켜보았고 또 그 누군가에게 이야기하였고 또 누군가에게 전달하였던 바로 그 아픔이구나. 죽창, 대검, 대못은 결코 잊을 수 없는, 대나무의 시뻘건 아픔이었음을 아니 우리 모두의 아픔임을 오늘 또 귀 베이며 나는 듣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대숲은 바람 불 때마다 서로 사랑하고 또 사랑해서 흔들린다고 본다. 푸른 대나무는 가슴 맞대고 머리 맞대고 영혼 맞대고 비비며 그 푸름을 키우는 것이라고 믿는다. 사람과 사람이 서로 가슴 비비고 얼굴 맞대며 어울려 살아가듯이, 그 삶이 깊어가듯이, 대나무는 깊은 사랑으로 땅 속까지 긴 뿌리를 내리고 하늘로 키를 쭉쭉 키우는 것이라고, 자신을 향해 시퍼런 칼날을 겨누는 것도 바로 자신을 향한 지독한 사랑이라고 믿는다. 그것이 바로 내가 대나무 숲을 즐겨 찾는 이유이기도 하다. [글 문상금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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