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2024-04-23 21:01 (화)
[문상금의 시방목지](14) 십자가
[문상금의 시방목지](14) 십자가
  • 문상금
  • jeju@newslinejeju.com
  • 승인 2021.04.05 10:4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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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무지(荒蕪地)는 희망이다, 재생이다, 부활이다, 희망의 메시지이다. 십자가(十字架)는 육중한 고통이다, 피 흘림이다, 역시 희망이다, 사랑이다, 또 부활이다. 황무지와 십자가는, 현대인(現代人)들에게 보내는 희망의 강력한 의지와 따뜻한 사랑의 메시지이다’

십자가
 

문 상 금
 


이상도 하지

분명 하얀 철책 위로
피어오른 장미나무인데,

십자가를
지고 있는 사내
아니 온몸이 십자가인 사내

붉은 꽃을 피워 올린다
무수히 가시 찔리며

때로 이 세상 어디에나
육중한 십자가 같은
고통은 있어

누군가의 가슴에
가장 아름다운 보석으로
빛날 수 있는 것이다
 

- 제4시집 <꽃에 미친 女子>에 수록
 

문상금 시인
▲ 문상금 시인 @뉴스라인제주

영국의 대문호 엘리엇(1948년, 노벨문학상 수상)은 <황무지>에서 ‘4월은 가장 잔인한 달 /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 기억과 욕망을 뒤섞고 / 봄비로 잠든 뿌리를 뒤흔든다.’ 라고 표현하였다. 만물이 소생하고 온갖 꽃들이 피고 지는 봄날을 왜 가장 잔인한 달이라고 했을까? 늘 궁금하였다.

희망적이고 축복받은 4월을 부정한다는 것은 시인 자신의 개인적인 불행의 기억을 고백하는 것은 아닐까, 아니면 생명의 부활들이 곳곳에서 아우성으로 터져 나오는 이 찬란한 봄날에 겨울 분위기 물씬한 흡사 죽은 목숨이나 가사(假死) 상태를 간절히 원하고 있었는데, 황무지에 톡톡 희망의 씨앗이 싹트고 있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생각해보면 가장 잔인한 달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봄 중에서도 한창인 4월은 희망과 재생의 계절인데도, 황무지의 주인들은 겨울의 평화로운 죽음과 망각의 잠을 더 좋아하고, 부활을 위한 꿈틀거림을 오히려 귀찮고 잔인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작고 연약한 씨앗들이 아직 겨울인 단단한 땅을 뚫고 뿌리를 내리고 또 지상으로 싹을 틔우며 나와야 한다는 것은 실제로 엄청난 고난이고 시련의 길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엘리엇은 ‘4월은 가장 잔인한 달’ 이라고 표현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돌이켜보면 4월엔 개인적으로 아픈 기억들이 참 많다. 첫사랑과의 이별도 그랬고 친정어머니의 투병 생활의 시작, 시어머니의 죽음 그리고 무엇보다 제주에는 무자년 4.3 사건이라는 슬프면서도 가장 기억해야 하는 아픔도 있어서 그런지, 어쩐지 4월이 시작되면 주눅이 들곤 한다.

‘가슴 아프다’란 표현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 여태껏 잘 몰랐던 것 같다. 언제부턴가 계란 노른자를 먹을 때처럼 목이 메고 가슴이 답답해지며 오싹한 느낌에 온몸이 떨릴 때가 있는데, 이런 게 바로 그런 것일까. 그런 느낌이 들기 시작하면 아주 불안해지곤 한다.

첫사랑은 두 번 다시없는 홍역이었다. 만남과 이별을 반복하다 결국은 마치 종이배를 시냇물에 띄워 보내듯, 천천히 놓아주었다. 행복한 뭍에 당도해 단단히 뿌리 내리기를 기도하였다.

팔순잔치를 하고 건강하시던 친정어머니가 봄이 한창일 때, 내가 친정에 들렸을 때 윗옷을 벗으시며 겨드랑이 밑을 한 번 만져보라고 하셨다. 무심코 손을 뻗었는데 계란 같은 덩어리가 만져졌고 온 몸이 오싹해졌다. 그건 좋은 징조가 아니었다. 친정아버지가 돌아가실 때에나 그리고 시아버지가 돌아가실 때 골목길을 부축하여 병원으로 갈 때, 나는 그런 느낌을 받았던 것이다. 이튿날 어머니를 모시고 검사에 들어갔는데 이미 여러 군데 종양들은 번져 있었다. 필름사진을 통해 곳곳에 둥지 튼 종양들은 더 이상의 치료는 힘들고 고통이 덜하기만을 도와줄 수 있다고 의사는 담담히 말했다.

아무것도 모른 채 내 손을 꼭 잡은 어머니랑 한라산을 넘어오는데 길가 나무 밑에 산수국(山水菊)들이 지천으로 피어 있었다. 푸르스름한 그것은 도체비꽃이라고도 불렀다. 차창 밖을 가리키며 “산수국이 참 많이 피었네. 어머니는 꽃 중에 무슨 꽃이 젤 좋아?” “꽃은 다 예쁘고 좋지, 그래도 난 장미꽃이 제일 예쁘더라. 튤립도 예쁘고” 괜히 눈시울이 붉어졌다. 내가 해마다 봄 내내 보러 다니곤 하는 장미꽃을 어머니도 그렇게 좋아하셨다니! 그 날 오후에 어머니를 모시고 몇 군데 장미꽃을 보러 다녔다. 아파트 담벼락이나 오래된 돌담 위 그리고 슬레이트 지붕 처마 끝에 알 굵은 루비 보석처럼 다닥다닥 피어있는 장미들을. 그리고 겨울 첫 눈이 내릴 무렵 고열과 통증이 찾아오면 아기처럼 나는 어머니를 팔베개하고 등을 톡톡 다독여주곤 하였는데 그렇게 편안하고 고운 모습으로 저 세상으로 길 떠나셨다.

또 이듬해 잔인한 사월을 며칠 남겨둔 바람 몹시 불던 어느 날, 딸애의 다급한 전화를 받았다. 횡단보도를 건너던 할머니가 차에 치였다고 울음범벅인 목소리를 달래며 응급실로 달려갔지만 이미 맥은 희미하게 뛸 뿐이었고 축 늘어진 손은 차가워져 있었다. 그렇게 시어머니는 돌아가셨다. 한순간의 허망한 일생이라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5일장을 묵묵히 치르며 귀양을 내고 칠일 제를 지내며 단지 좋은 곳으로 가시기만을 간절히 기도할 뿐이었다.

겨울 황무지를 견디고 이제 거칠고 단단한 땅을 뚫고 뿌리내릴 어린 씨앗들아, 이제는 잔인하다고 생각하지 말라. 축복받은 삶이라고 생각하여라. 시련이 삶을 물들일 때라도 담담하게 그 삶을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으면, 이 세상 달고 쓴 것에 일일이 시달리지 않고 살아갈 수 있으리라.

삶의 빛깔을 고르라고 하면 무채색이다. 울긋불긋 더 고운 색채들을 넣을 수 있기 때문이다. 땅을 고르라고 하면 황무지이다. 가시덤불을 치고 돌을 골라내고 흙을 다독여 기름진 땅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엘리엇은 <황무지>란 장시(長時)를 통해 희망의 메시지를 보내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황무지(荒蕪地)에 희망의 씨앗을 싹트게 하기 위해서는, 껍질을 뚫고 나오려는 새싹들의 희망을 향한 강력한 의지와 더불어 햇살 같은 따뜻한 사랑이 필요하다는 메시지도 함께 보내고 있다는 것을 잘 알아야 한다.

오늘도 어린 새순이 돋아나고 있는 장미나무를 한참 바라다보았다. 무성해진 잎 사이로 꼬물꼬물 봉오리들이 올라와, 어느 순간 찬란한 꽃을 피울 것이다. 그 꽃을 보고만 있어도, 그 꽃잎을 만져만 보아도 가슴이 뜨거워지고 설렐 것이다. 붉은 꽃잎처럼 누군가의 가슴에 가장 아름다운 보석으로 날아가, 정열적으로 하루하루를 살아나갈 수 있는, 눈부신 봄의 그 날이 기다려진다.

해마다 피고 지는 장미를 보며 참 많은 시를 썼다. <십자가>도 장미 향(香) 맡으며, 오랜 시간 시어를 다듬은 시 중에 하나다. [글 문상금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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