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2024-04-24 18:02 (수)
[자청비](13) 꽃길만 걸으세요
[자청비](13) 꽃길만 걸으세요
  • 이을순
  • jeju@newslinejeju.com
  • 승인 2021.03.31 1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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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을순 소설가
이을순 소설가
▲ 이을순 소설가 @뉴스라인제주

며느리가 내게 봉투 하나를 건넨다. ‘꽃길만 걸으세요’ 내 시선이 절로 겉봉투에 쓰인 캘리그라피 글씨체에 쏠린다. 봉투 안에 들어 있는 돈의 액수보다 글의 의미가 더 나를 잡아끈 것이다. 꽃길이란 과연 어떤 길일까? 이윽고 며느리가 돌아가자, 너른 앞마당으로 나와본다. 백 년도 더 지난 연못 옆 메타세콰이어와 와싱토니아야자수가 있는 모퉁이에서부터 서서히 마당 한 바퀴를 둘러본다. 곳곳에 봄을 알리는 화사한 꽃들이 활짝 피어 있다. 목련, 수선화, 배꽃, 흰색 남경도, 붉은색 남경도, 붉은색 옥매, 흰색 옥매, 박테기 꽃, 이스라지 꽃, 빈가마이너 꽃, 죽단화 등 각양각색의 탐스러운 꽃들이 내가 스칠 때마다 날 반기며 방긋방긋 웃어준다. 잠깐 걸음을 멈춘 후, 꽃잎들을 조심스럽게 만져본다. 갓난아기 살결처럼 아주 여리고 보드라운 촉감이다. 상큼하고도 싱그러운 진한 꽃향기가 코끝에 닿자, 꽃향기를 마음껏 들이마시어 본다. 이토록 아름다운 꽃들을 피워내려면 모진 혹독한 추위와 싸워서 이겨냈을 터이다. 그때, 돌담 가에 활짝 핀 홍왕벚나무가 시야로 들어온다. 갑자기 불어대는 바람결에 꽃잎들이 후두두, 떨어지고 있다. 한순간 바닥이 온통 꽃잎으로 널려 있다. 문득 꽃길이 걷고 싶어진 나는 서둘러 그쪽으로 향한다. 이내 꽃비가 내린 화사한 땅바닥을 작은 원을 그리며 걸어본다. 분명 꽃길은 꽃길이다. 그렇다, 우리는 먼 길을 돌아 돌아서 지금 여기까지 오게 되었다.

뒤돌아보면 파란만장했던 삶이었는지도 모른다. 내가 암의 진단을 받고 치료를 받을 때가 아들이 초등학교 막 입학할 무렵이었고, 딸아이는 유치원생이었다. 어린 자식들 걱정에 좀처럼 잠을 이루지도 못했다. 그 고통과 서글픔의 눈물은 내 인생의 가시밭길에 씨앗으로 뿌려졌다. 그리고 生과 死의 징검다리에서 너무나 일찍 책에서 배울 수 없는 인생을 배우고 말았다. 그 무렵, 남편은 사업을 하겠다며 잘 다니던 대기업 직장에 사표를 내던졌다. 그 뒤 우리 가족은 고향인 제주로 내려왔고, 남편은 사업도 시작해보지 못한 상태에서 거래처에서 부도를 내고 말았다. 그 바람에 우리의 피눈물은 울퉁불퉁한 자갈밭 길에 씨앗으로 흩뿌려졌다. 우리를 기다리는 건 메마르고 거친 황무지 땅 같은 인생뿐이었다. 남편은 그토록 거친 황무지를 비옥한 농토로 개간하기 위해 그야말로 악착같은 인고의 세월을 버텨냈다. 오로지 성실과 부지런함으로 앞만 바라보고 달려왔던 그 많은 세월. 그 값진 땀방울은 희망의 씨앗이 되어 황무지에 뿌려졌다. 그렇게 살다가 보니 그 씨앗들이 말라 죽지 않고 용케도 잘 살아서 새싹을 틔웠다. 그 줄기에서 꽃봉오리가 맺혔고, 그것들이 차츰차츰 꽃으로 활짝 피어나면서 마침내 삶의 탐스러운 열매로 영글어 주었다. 그즈음, 장성한 아들과 딸은 결혼하였고, 남편 또한 사업을 접고 농부가 되었다.

지금 앞마당과 뒷마당에는 그동안 남편이 심어놓은 다양한 과실나무와 꽃나무가 참 많다. 아침에 눈을 뜨면 새들이 나무에 날아들어 짹짹 노래를 불러주고, 때때로 꿩들도 놀러 와서 알을 낳아 품기도 한다. 남편은 사업할 당시 이곳 불모지였던 땅에 각종 나무와 꽃을 심으면서 스트레스를 풀었고, 그 자연에서 자기만의 삶의 위로를 받았다. 그러니까 이곳 하귀 ‘소정원(素靜園)’은 우리 노년의 보금자리가 되어 준 것이다. 소박하고 고요한 정원의 뜻을 가진 ‘소정원’. 바로 이곳이 남편과 나의 인생의 꽃길인 셈이다. 어쩌면 우리는 진작 며느리가 건넨 겉봉투에 새겨진 글씨처럼 진정한 마음의 꽃길만 걸으며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걸 며느리가 다시금 우리에게 일깨워준 것이다. 그러니 남편과 나는 앞으로의 남은 인생을 이곳 하귀 소정원을 마음의 비타민으로 여기며, 꽃길만 쭉 걸으며 살리라. 나 또한 더 늦기 전에 며느리에게 받은 봉투에 시어머니의 사랑을 담뿍 담아 보답하리라. 며늘님, ‘꽃길만 걸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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