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2024-03-29 18:47 (금)
[문상금의 시방목지](13) 이중섭도 아니면서
[문상금의 시방목지](13) 이중섭도 아니면서
  • 문상금
  • jeju@newslinejeju.com
  • 승인 2021.03.29 1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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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강은 민낯이다, 가끔 눈코얼굴이 민낯으로 붉어질 때, 가장 겸손한 나 자신과 만난다. 빨갛다는 것은 불이다, 사랑이다, 피 토하듯, 울부짖는 황소의 소리이다, 몸짓이다, 열정이다. 죽어서 더 활활 살아있는 혼(魂) 불이다.’

이중섭도 아니면서

문 상 금

해 저무는 거리를
먼나무는 줄지어 걷는다
붉은 서귀포 거리를 걷는다

이중섭 거리
서귀포 성당
서귀진성을 천천히 지나
자구리 바다까지

이중섭도 아니면서
그저 시를 쓰고
시낭송을 하고
그림을 좋아하면서
가끔 먼나무의
그 빨간 열매와 잎을 바라보면서
자유로워진다

사람과 개들이 오가는
이 서귀포 붉고 경사진 알자리 동산에서
뻥 뚫려 바람이 제 집처럼 드나들던
가슴은 어느새 가득차고
목 메이도록 그리움이 달려들 때
한없이 자유로워진다

그 이유가 무얼까,
무엇일까

댕댕거리는
성당 종소리

푸른 별들이 하나둘 태어나
깊어가는 이 저녁에
서귀포 거리를 걷고 있는

먼나무는
시인(詩人)

나도
그저
시인(詩人)

먼나무와
나는 시인(詩人)

- 제5시집 <첫사랑>에 수록
 

문상금 시인
▲ 문상금 시인 @뉴스라인제주

벚꽃 눈이 내린다. 분분히, 기쁨 하나 슬픔 하나 작은 절망 하나 내린다. 늦은 꽃샘추위와 쌀쌀한 바람을 뚫고 꽃봉오리들은 하루 사이 활짝 피어났다, 그리고 사나흘 이 세상에서의 짧은 소풍을 끝내고 한 잎 두 잎, 머리에 어깨에 신발 위로 툭 툭, 그것들은 허공에 시(詩)가 되어 분분히 내린다.

벚꽃 눈들을 밟아본다. 뽀드득 소리도 없는 어떤 아릿한 아픔 같은 것, 섭섭함 같은 것, 그리움 같은 것들이 짜르르 양발을 타고 양손을 거쳐 온몸으로 퍼진다.

벚꽃눈이 내리는 이중섭거리를 걸어본다. 언제부턴가 나는 일주일에 두서너 번을 이 거리에서 보내고 있다. 그만큼 아끼고 사랑하는 것이다. 거리를 걸어갈 때마다 서귀포 시내 중에서도 이중섭거리가 그나마 활기에 넘치고 있음을 느낀다. 이것 또한 힘의 원천이고 힐링(healing,치유)으로 가는 길이다. 서울의 인사동과 전주의 한옥마을 같은 북적거림은 없어도 무언가 내면 깊은 곳에서 따뜻함이 솟아나오는 문화 예술의 거리, 치유의 거리를 찬찬히 걸어본다. 아스팔트 보도나 하늘 가로등 위에도 이중섭의 그림이 매달려 있다. 알록달록 다양한 색채의 세상이다. 공방, 카페, 식당에도 이중섭거리임을 알리는 사인물들이 보인다. 서귀포에서 이중섭이 보았던 그 이상향(理想鄕)의 세계가 바로 이런 색채였을까. 자꾸만 어기적거리며 모로 가는 게들이 떼를 지어 거리로 바각바각 쏟아져 나올 것 같다.

섶섬이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미술관 안에는 여러 점의 원화와 은지화 그리고 이중섭이 사용했던 팔레트가 전시되어 있다. 이 팔레트는 이중섭이 1943년 제7회 미술창작가협회(자유미술가협회 전신)에 <망월> <소와 소녀> <여인> <소묘> 등 9점을 출품했을 때 특별상인 태양상을 수상했고 그 부상으로 받았던 것이다. 그리고 일본에서 그림을 그릴 때 사용하다 연인이었던 이 남덕(마사코)여사에게 사랑의 징표로 주었다 한다. 오랫동안 그 사랑의 징표를 간직하고 계시다 2012년 11월 이 남덕 여사는 이중섭 미술관에 기증을 했다. 그 당시 서귀포 방문 때 이중섭거리 예술시장에서 같이 사진도 찍고 동행했던 기억이 새롭다. 휠체어를 타고 앉아 계시던 모습, 조심스레 일어나 투박한 질감의 도자기 접시들이며 천연염색 옷감들을 찬찬히 살펴보시던 그 단아한 모습이, 일 년에 한 번씩 꼭 재방문하고 싶다고 하셨는데, 세월이 참 녹록치 않다.

미술관에는 이중섭이 아내에게 보냈던 편지들도 많이 전시되어 있다. 편지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생활고 때문에 아내와 아들들을 일본으로 떠나보내고 절절히 그리워했던 그 애틋한 마음이 시공을 초월해 감동을 주곤 한다. 편지의 내용을 읽어보지 않고 편지 여백에 빼곡하게 그려진 작은 그림만 봐도 느낄 수 있다. 두 아들과 아내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을 피 토하듯 스케치하고 그 위로 물감을 덧칠하던 화가의 투박하고 굵직한 손놀림을. 초가 거주지 1.4평짜리 남루한 방에서 꼭 껴안고 견디었을 그 네 명의 체온은 하늘 위로 날아올라 오늘까지도 아름답고 살아있는 사랑이야기로 사람들을 끌어 모으고 있는 것이다.

창 너머로 벚꽃이 피고 또 창 너머로 벚꽃 눈이 내리다 녹은 한참 뒤에도 길거리 먼나무의 빨간 열매들은 더 짙어질 뿐, 붉은 눈으로 내리지도 못한 채, 하루해가 저문다. 서귀포의 겨울과 봄을 붉은 눈이 되어 내리지 못할 바에는 차라리 이 거리에서 시인이 되어라, 먼나무여!

한없이 마음이 따뜻해지는 이중섭거리에서, 누구나 시인이 되고 화가가 되어 시를 쓰고 그림을 그리고 또한 자유인이 되는 이 거리에서, 그대여, 오늘은 먼나무가 되어 시인이 되어 걸어 보아라. 영혼의 미세한 떨림을 감지하며 상처에 새살 솟듯 다시 태어나고 또 태어나려니, 그 설렘과 따뜻함 때문에 나는 매일 이중섭도 아니면서, 이중섭거리를 꽁지 빨간 고추잠자리처럼 맴돌고 있는지도 모른다. [글 문상금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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