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2024-04-19 11:23 (금)
[자청비](12) 산다는 것과 살아낸다는 것
[자청비](12) 산다는 것과 살아낸다는 것
  • 이을순
  • jeju@newslinejeju.com
  • 승인 2021.03.24 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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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을순 소설가
이을순 소설가
▲ 이을순 소설가 @뉴스라인제주

태풍이 휘몰아치던 어느 오후, 한 통의 전화가 핸드폰으로 걸려 왔다. 전화를 받자 상대방 남자는 내가 소설을 쓰는 작가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러면서 대뜸 만나고 싶다고, 자기의 이야기를 소설로 써달라고 부탁했다. 나는 당황했고 잠깐 할 말을 찾지 못했다. 오, 젠장! 하필이면 이런 전화가 걸려올 게 뭐람. 내 의식 어딘가가 심하게 요동쳤다. 언뜻 공포영화의 한 장면이 눈앞에 어른거린 것이다. 상대가 날 범죄의 표적으로 삼은 게 아닐까? 두려움과 동시에 불길한 예감이 심장을 짓눌렀다. 그렇다고 그 이유를 묻지 않을 수도 없었다.

그는 아주 오래전에 제주에 내려와 살게 되었다. 한옥을 짓는 사업을 했고, 한때 돈도 많이 벌었다. 그런데 잘나가던 사업이 점차로 어려워지자 아내가 바람을 피웠고, 마침내 집을 나가버렸다. 그래서 현재, 아들과 함께 살고 있다. 희망도 꿈도 없는 채 자살만을 생각하면서. 이대로 그냥 죽으면 아무래도 하나뿐인 아들에게 씻을 수 없는 죄를 짓고 떠나는 것 같아, 지난 이야기를 소설로 남겨두고 싶은 것이다. 그래야 아들에게 떳떳한 아빠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그게 그의 말의 요점이었다.

한 인간의 삶의 비극적인 스토리를 들으면서 나는 우울하게 한숨을 지었다. 내가 그에게 해줄 것이라곤 그저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뿐. 물론 벼랑 끝에 서 있는 한 남자의 모습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의 요청을 들어줄 순 없었다. 나는 정중히 거절하면서 몇 마디 덧붙였다. 지금 당신이 그토록 죽을 만큼 힘들고 괴롭다고 생을 포기할 생각을 한다면, 그것은 아들에게 비겁한 아빠가 될 것이라고. 설령 당신이 죽고 난 후, 지난 이야기를 소설로 남긴다 한들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냐고. 그렇게 죽을 각오라면, 차라리 다시 용기로 갖고 열심히 삶을 살아가는 게, 아들에게 오히려 떳떳한 아빠가 될 것이라고 조심스럽게 조언했다. 그래도 그는 반드시 자기 이야기를 소설로 남겨야 한다고 박박 우겼다. 그런 다음 꼭 자살할 것이라며 끈질기게 통화에 매달렸다. 차마 전화를 끊을 수 없었다. 상대의 얘기를 충분히 들어주지 않고 전화를 끊는다면, 그는 다시 또 전화할 게 뻔했기 때문이다. 한참 동안 그의 이야기를 들어주던 나는 마지막으로 한마디 더 덧붙였다. 당신의 마음이 그토록 고통스럽다면 교회든, 절간이든 찾아가서 신을 붙들고 간절히 기도라도 해보라고. 그리고 병원으로 가 시한부로 살아가는 사람들도 만나보라고. 그들에겐 당신이 그렇게 버리고 싶다는 세상을 너무나 간절히 원하고 있다고. 그러니 소중한 생명을 함부로 버릴 생각은 하지 말라고 애써 달랬다. 하지만 그는 교과서적인 말만 골라서 한다고 되레 내게 짜증을 냈다. 그러면서 자기의 부탁을 들어줄 수 없다면 다른 소설가라도 소개해달라고 했다. 나는 단호히 거절했다. 정말 당신이 지난 이야기를 소설로 남기고 싶다면, 지금의 위기를 극복한 후에 당당히 소설가를 찾아가 부탁해보라고. 그러고는 내가 먼저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모든 일에는 흥망성쇠가 있다. 누구에게나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때때로 극복하기 힘든 위기의 상황들과 맞닥뜨리게 된다. 그것을 극복한 자는 승자가 될 것이요, 그러지 못한 자는 패자가 될 것이다. 그 승자와 패자 또한 자신의 마음속에 있을 것이다. 어떤 자는 어려운 일에 처하게 되면, 그게 오롯이 자기한테만 있다고 불만을 터뜨린다. 타인들은 모두 괜찮은데 유독 자기만 불행하다고. 하지만 인간은 그 안을 들여다보면 나름대로 말할 수 없는 고통과 아픔들이 있다. 다만, 그걸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가슴에 묻어두고 있을 뿐이다. 그 속을 드러내 봐야 자신만이 더 초라해지기 때문이다. 그냥저냥 묵묵히 살다가 보면, 언젠가 다시 활짝 웃을 날도 찾아올 것이라는 걸, 그들은 알고 있기에 참고 인내하는 것이다.

세상살이 삶이란, 지구처럼 둥글게 돌고 돌아가는 게 아니던가. 인생을 산다는 것과 살아낸다는 것을 깨달은 자는, 자기의 지난 이야기를 결코 소설로 남기지 않는다. 소설은 픽션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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