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2024-04-19 11:23 (금)
[양순진의 시의 정원](44) 그냥 눈물이 나
[양순진의 시의 정원](44) 그냥 눈물이 나
  • 양순진
  • jeju@newslinejeju.com
  • 승인 2021.01.26 1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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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주 시인
▲ 김경주 시인 @뉴스라인제주

그냥 눈물이 나

김경주

옆구리가 터진 채
해변으로 흘러온
고래의 파란 흉터에
그냥 눈물이 나

국자에 뜨거운 수프를 받아 와
다친 고래의 입술에
부어주는 소년과
입가로 흘러내리는 침에
그냥 눈물이 나

'내가 집에 데려갈게'
눈발 속에서 입을 맞추는
둘의 자폐에
그냥 눈물이 나

*

가출 후 자기 아파트 옥상 물탱크 속에서
몇 달을 살았다는
어느 여고생의 詩에
그냥 눈물이 나

"난 겁이 나......"
"나도 오늘 내 집으로 돌아가.."

그러나 물이 들어차
무수히 많은 빵 봉지들과 함께
노란 물탱크 속에
그 소녀 카나리아처럼 떠 있었다는
죽음의 묘사에
그냥 눈물이 나

*

복권에 당첨되어 달아난 아비를
모르고 문패를 뜯어
발로 차며 노는
아이들의 천진함에
그냥 눈물이 나

입속에 천국을 만들고
북방의 달문[月門]을 가리는
귓속에도 살이 찐
벼슬들에게
그냥 눈물이 나

*

모든 것을 가만히 둔 채
아무것도 멈추지 않은
시인들의 생식기에

불에 태운 설탕을 좋아하는
그들의 수사에
지적인 은신처에
그냥 눈물이 나

*

너무 성급하게 우린
첫눈에 반해버려
그 말에 그냥 눈물이 나

시를 다시는 보지 않겠다며
지면으로 울혈을 푸는 철학자의
피곤에 대해
그냥 눈물이 나

*

언제부턴가 신문지는 꽃잎이나
말리는 것으로 사용했는데

오래된 신문을 모아 햇볕에 놓아두면
습기도 날려버리고 소란도 옮겨 놓고

활자들도 구절초나 산국이나 쑥부쟁이처럼
향기도 기슭도 버리고
사나운 시절을 견딜 것 같아 모아두었다

그런데 오늘 아침 기사는

시집은 쌉니다

그냥 눈물이 나
나, 그냥


- 김경주 시집, <고래와 수증기>, 문학과지성사, 2014.

양순진 시인
▲ 양순진 시인 @뉴스라인제주

어디선가 '어린 왕자'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 하다. '그냥 눈물이 나 / 나, 그냥'

  우리가 살아가면서 그냥 눈물이 나는 일이 얼마나 허다한가. 베를렌느가 '거리에 비 내리듯 이유 없이 눈물이 흐른다' 했듯이 오늘처럼 비 내리면 그냥 눈물이 난다. 방실방실 웃는 아가 얼굴 보면 너무 행복해서 그냥 눈물이 난다. 사랑하는 사람이 너무 멀리 있어 간절하게 보고 싶을 때 그냥 눈물이 난다. 어버이날 카네이션 사서 어머니 무덤가에 꽂을 때 그냥 눈물이 난다. 힘겨운 코로나 시간 속에서도 샛별 같은 행운이 당도하면 그냥 눈물이 난다.

  시인도 그냥 눈물이 난다. 옆구리 터진 고래의 파란 흉터, 가출한 소녀가 노란 물탱크 속 카나리아처럼 떠있었다는 죽음의 묘사, 입속에 천국을 만들고 북방의 달문을 가리는 벼슬, 시인들의 생식기와 지적인 은신처, 철학자의 피곤에 그냥 눈물이 난다. 더 슬픈 일은 사나운 시절 견디며 모아둔 영혼의 꽃인 시집을 껴안았는데 '시집은 쌉니다'라는 기사에 그냥, 그냥 눈물이 난다.

  시는 쌉니다. 시집은 쌉니다. 시인은 쌉니다. 그래서 눈물이 난다. 꽃잎만큼이나 많은 단어를 모으고 나일강보다 많은 기억을 채집하는 것이 취미가 된 시인은 돈보다 부질없는 것들을 번다.
  예쁜 단어 하나에 취해 며칠을 굶는 시인의 소화기는 생각보다 좁다. 복권보다 시어를 모아 방을 채우고 넓은 방이 다섯 있는 집보다 좁은 단 한 칸의 방 있는 시집 속에 누워도 전혀 초라하지 않은 시인.    그래서 눈물이 난다. 시인이라는 것이 전혀 슬프지 않아 눈물이 난다. 시어를 씹어먹고 시어를 마시고 시어와 블루스 추며 불경기를 견디는 시인의 처방법이 눈물이 난다. 눈발 속에 고래와 입맞춤하던 기억에 눈물이 나, 그냥.

  저 빗물이 시라면, 저 눈물이 시라면, 저 슬픔이 시라면, 저 아픔을 다 모은다면 시인은 부자가 되어야 한다. 비싸져야 한다. 그런 상상에 그냥 눈물이 난다.[글 양순진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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