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2024-04-19 11:23 (금)
[양순진의 시의 정원](42) 눈풀꽃
[양순진의 시의 정원](42) 눈풀꽃
  • 양순진
  • jeju@newslinejeju.com
  • 승인 2021.01.13 14:2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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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스 글릭
▲ 루이스 글릭 @뉴스라인제주

눈풀꽃

루이스 글릭
 
내가 어떠했는지, 어떻게 살았는지 아시는가.
절망이 무엇인지 안다면 당신은
분명 겨울의 의미를 이해하리라.
 
나 자신이 살아 남으리라고 기대하지 않았었다,
대지가 나를 내리 눌렀기에.
내가 다시 깨어날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었다.
축축한 흙 속에서 내 몸이
다시 반응하는 걸 느끼리라고는.
그토록 긴 시간이 흐른 후에
가장 이른 봄의
차가운 빛 속에서
다시 자신을 여는 법을
기억해 내면서.
 
나는 지금 두려운가, 그렇다. 하지만
다른 꽃들 사이에서 다시
외친다.
'좋아, 기쁨에 모험을 걸자.'
 
새로운 세상의 살을 에는 바람 속에서.

양순진 시인
▲ 양순진 시인 @뉴스라인제주

영화 <내가 죽던 날>의 배우 김혜수가 낭송하는 '눈풀꽃'을 들으며 아침을 맞는다. 어제 눈발이 흩날리는 설국의 5.16도로 지나 서귀포 다녀온 뒤 우연히 제주문예회관에 들렀다. '바람꽃'이라는 꽃그림전과 '붓 끝의 여정'이라는 서예전 둘러 보며 피어나는 꽃과 의미 있는 글에 마음의 위안을 받은 터다.
  내가 낳은 딸은 지금 새 생명을 피우려고 산통을 겪는 중이고 코로나 위기는 백신과 지원으로 해결하려는 중이다. 그렇게 모든 삶은 멈추지 않고 순환하며 겨울에서 봄으로 내딛는 것이다.

  우리에겐 생소한 눈풀꽃(snowdrops)은 이른 봄 땅속 구근에서 피는 작은 수선화처럼 생긴 흰꽃으로 설강화라고도 불리며 정식 명칭은 갈란투스다. 꽃말은 '첫사랑, 희망'이다. 체코의 문호 카렐 차페크(karel capek)는 '봄의 메시지'라 예찬까지 했다.
  더 놀란 것은 이 시는 우리나라에는 잘 알려지지 않던 작가였으나 2020년 노벨문학상을 거머쥔 미국의 여류 시인 루이스 글릭 ( Louise Glück)의 작품이다.

  류시화 시인은 <마음 챙김의 시>에서 이 시를 번역, 발표했고 인생이라는 계절성 장애를 겪으며 잠시 어두운 시기를 지나는 사람들에게 읽어주고 싶은 시라고 페이스북에도 소개했다.

  문득, 하얀 눈풀꽃과 색깔은 다르지만 이른 봄 눈 속에 피어나는 제주의 꽃, 복수초가 떠올랐다. 겨울잠에 빠지려는 몸 이끌고 오른 어느 오름에서 처음 보았던 눈 속의 노란 꽃.
  이 시를 암송하다 보면 그동안 겪었던 어둠과 절망의 순간들이 한꺼번에 쏟아진다. 그때는 크고 무겁고 불운이라 여겼던 기억들이 지금은 부질없고 하찮고 우스운 가벼운 문제였다고 결론 얻게 된다. 그것은 아무리 악한 상황에서도 견디는 법과 다시 자신을 여는 법을 체득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무리 무섭고 두려워도 '좋아, 기쁨에 모험 걸자'는 의지로 꿋꿋하게 다시 살아냈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보이진 않지만 주어진 삶이기에 충실히 모험과 불행에 대한 복수와 남아있는 삶에 제동을 걸었기에 오늘의 우리가 있는 게 아닐까.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운 좋은 삶'이니까.

  루이즈 글릭은 '야생 붓꽃'이라는 시에서 더 치열하게 외친다. 상처 받은 삶을 복원하라고.


  ​고통이 끝날 때쯤
  문이 있었어요.

  내 이야기를 들어주세요.
  당신이 죽음이라고 부르는 것을
  기억해요.

  ​머리 위, 소음, 소나무 가지들이 흔들리고    있어요.
  그 후로는 아무것도 없이, 연약한 햇살이
건조한 들판 위에서 깜박거렸어요.

  어두운 땅속에 묻혀
  의식으로 생존한다는 것은,
  소름 끼치는 일이에요.

  그때 끝났어요.
  당신이 두려워하는 것이,
  영혼으로 존재하면서 말할 수 없는 상태가,
  갑자기 끝나고,
  뻣뻣한 땅이 약간 기울었어요.
  그러자 내게 새라고 여겨지는 것들이
  낮은 수풀더미 속으로 돌진했어요.

  다른 세상에서 돌아오는 통로를
  기억하지 못하는 당신
  당신에게 말하지요,
  내가 다시 말할 수도 있으리라는 것을,
  망각에서 되돌아오는 것은 무엇이든지
  되돌아와 목소리를 낸다는 것을,

  내 삶의 한 가운데에서
  담청색 바닷물에 얹힌 심청색 그림자들,
  커다란 샘물이 솟았지요.

                            - '야생 붓꽃'  전문 [글 양순진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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