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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순진의 시의 정원](41) 사평역에서
[양순진의 시의 정원](41) 사평역에서
  • 양순진
  • jeju@newslinejeju.com
  • 승인 2020.12.31 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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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재구 시인
▲ 곽재구 시인 @뉴스라인제주

사평역에서

곽재구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 시린 유리창마다
톱밥 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내면 깊숙이 할 말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 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
한 두름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오래 앓은 기침 소리와
쓴 약 같은 입술 담배 연기 속에서
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
그래 지금은 모두들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
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
밤 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지
그리웠던 순간을 호명하며
나는 한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양순진 시인
▲ 양순진 시인 @뉴스라인제주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 나오자 설국이었다.'로 시작하는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노벨문학상 작품 <설국>을 밤새 읽고 싶은 폭설의 밤이다. 하루종일 흩날리는 눈발의 화음에 먹먹하던 가슴이 기차처럼 열리고 목적지도 없이 마냥 상상의 나라로 달렸다. 그러다 도착한 마음의 간이역인 '사평역'!

  80년대 대표적인 서정시로 등록되어 있지만 그 이후에도 오랫동안 사랑 받고 있는 시다. 문학지망생들이나 시인들이 필사를 마다 않고 하는 시, 눈 내리는 날 꼭 낭송하고 싶은 시, 누구나 슬픔과 그리움을 동시에 태울 수 있는 시, 시대가 바뀌어도 이 지상에 남아 여전히 톱밥 난로로 지펴질 서정시의 백미가 아닐까.

  <설국>의 모델은 니가타, <사평역>의 모델은 광주 외곽의 아주 작은 간이역이던 남광주 역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실존하지 않는 사평역이라 칭했을까.
  곽재구는 그의 산문집 <길귀신의 노래>에서 '상상력은 현실 속에서 태어나지만 상상력은 강한 현실을 만나면 죽는다. 단적인 예로 실존하지 않던 사평역 대신 실존하던 남광주 역이란 이름을 썼더라면 이 시가 주는 환기력이 그리 크지 않았으리라.'고 밝히고 있다.

  막차, 송이눈, 톱밥난로, 청색의 손바닥, 귀향, 입술 담배, 눈꽃의 화음, 설원, 밤열차, 한줌의 눈물, 불빛 등 겨울의 대표적 이질적인 대상들이 조화롭게 어우러져 슬픔을 자아내고, 그 슬픔들이 그리움의 열차로 이어져 동질화 되는 민중의 희망이 장치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일까. 현실적 상상력은 낭만적 상상력으로 변주되고 휴머니즘의 든든한 바탕 위에 역사를 시로 승화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시의 힘이란 그런 것이다. 사소한 대상이 커다란 우주로 변하고 기대하지 않고 펼친 오솔길이 세계를 변화시킨다.

  설국에 홀로 갇혀버린 설야, '사평역에서'라는 시가 없었다면 이렇게 훈훈하고 따뜻해지고 차마 꿈조차 꾸지 못 했을 것이다. 시 한 편이 꿈이요 철학이요 사상으로 확장된다. 고로 '사평은 어디에도 없고 우리들 마음 어디에도 있다.'는 김훈의 논리가 맞아 떨어진다. [글 양순진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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